우리 문화에서는 “느리다”(slow)가 경멸의 표현으로 쓰인다. 우리는 아이큐가 낮은 사람을 느리고 둔하다고 놀린다. 웨이터가 느리면 서비스가 엉망이라고 불평하고, 영화 전개 속도가 느리면 지루하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메리엄 웹스터 사전은 “슬로우”(slow; 느리다)라는 영단어를 이렇게 정의한다. “정신적으로 굼뜨다. 어리석다. 천성적으로 활동력이 없거나 게으르다. 재빠르지 못하거나 의지가 부족하다.” 우리 문화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느린 것은 나쁜 것이고 빠른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거꾸로 나라에서는 가치 체계가 완전히 뒤바뀐다. 바쁨은 사탄의 속성이고 느림은 예수님의 속성이다. 예수님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나라의 다른 두 핵심 속성인 기쁨과 평안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나라 비전의 중심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이는 마음의 전반적인 상태다. 이는 단순히 좋은 감정 정도가 아니라,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구현하신 예수님을 따를 때 닮아 가는 내면의 상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두 바쁨과 양립할 수 없다.
--- p.40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서구 사회와 시간의 관계에서 전환점을 1370년으로 꼽는다. 그해에 독일 쾰른에 첫 공공 시계탑이 세워졌다. 그전에는 시간이 자연적이었다. 시간은 지구의 자전 및 사계절과 연결되어 있었다. 달이 뜨면 잠자리에 들고 해가 뜨면 눈을 떴다. 여름에는 낮이 길고 활기찼으며 겨울에는 날이 짧고 느렸다. 하루와 한 해에 리듬이 있었다. 프랑스 중세 연구가 자크 르 고프의 말을 빌리자면, 삶은 “바쁘지 않고 정확성과 생산성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농경 리듬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시계는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시계는 인공적인 시간을 만들어 냈다. 시계는 1년 내내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우리를 혹사시켰다. 이제 우리는 몸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 몸이 휴식을 마칠 때가 아니라 알람시계가 억압적인 사이렌을 울릴 때 눈을 뜨기 시작했다. 물론 효율성은 좋아졌지만 이제 우리는 인간보다 기계에 가까워졌다.
--- p.48
최근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평균 하루에 2,617번 자신의 스마트폰을 만진다고 한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하루 평균 76번 작업을 하며 하루 중 2시간 반을 사용한다. ‘모든’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그렇다. 밀레니얼 세대를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이 수치가 두 배로 높게 나왔다. 내가 읽은 모든 연구에서 대다수 설문 대상자들은 자신들이 스마트폰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지 전혀 몰랐다.
--- p.55
디지털 혁명 전인 2000년에는 주의 집중 시간이 12초였다. 이미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무려 8초로 떨어졌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금붕어의 주의 집중 시간을 보라. 금붕어의 주의 집중 시간은 9초다. 그렇다. 우리는 금붕어한테도 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을 앗아 가기 위해 ‘계획적으로’ 설계된 앱과 기기들이 말 그대로 수천, 수만 가지다. 이것들은 우리의 관심과 함께 우리의 돈을 노린다.
기억하라. 당신의 스마트폰은 사실 당신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물론 휴대폰 요금은 당신이 낸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당신이 아니라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자랑하는 대기업을 위해 일한다. 당신은 고객이 아니라 제품일 뿐이다. 휴대폰이 당신의 관심을 사용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앗아 가고 있다.
--- p.58
바쁨은 다른 무언가 원인이 있어 그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일 때가 많다. 더 깊은 무언가. 대개 그것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여기서 무언가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어릴 적 트라우마, 배우자에게서 받은 학대, 깊은 불안감, 자존감 결여,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한계라는 현실, 따분한 중년의 일상 등이 될 수 있다.
혹은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무언가는 승진이나 물건 구매, 경험, 여권에 찍힌 스탬프, 새로운 자극 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즉 자존감과 사랑과 환영받는 느낌을 좇아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오늘날 같은 능력주의 시대에서는 우리가 판매 실적이나 분기 보고서, 앨범 판매량, 설교에 대한 찬사의 반응, 인스타그램 포스트, 보유한 재물만큼만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숨을 헐떡이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을 좇고 있다.
때로 우리의 바쁨은 그리 극적이지 않다. 도피주의가 아니라 그냥 현대 세상에서 맡은 많은 책임들 때문에 바쁠 뿐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결과는 똑같다. 윌리엄 어빈이 말한 “잘못된 삶”이다.
--- pp.75-76
삶에는 정서적 무게, 나아가서 영적 무게가 있다. 우리 모두는 이 무게를 느낀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더더욱 그렇다. 쉬운 삶은 이 세상의 광고들과 소셜미디어가 일으키는 착각이다. 인생은 힘들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 속 모든 현자들이 계속해서 말했듯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신기술이나 약물로도 인류의 타락으로 생긴 고통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기껏해야 예수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면서 그 효과를 완화시키실 수만 있을 뿐이다. 고통을 아예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중략)… 교회 안팎에서 수많은 사람이 탈출구를 찾고 있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이생의 무게를 벗을 길을 찾고 있다. 하지만 탈출구는 없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필연적인 고통을 지연시키거나 부인하게 만들기 위한 일시적인 쾌락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탈출구를 제시하시지 않은 이유다.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곧 ‘장비’를 제시하신다. 예수님은 도제들에게 삶의 무게를 짊어질 전혀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신다. 쉽게. 그분과 나란히. 서로의 어깨를 연결하고 같이 일하는 밭의 두 소처럼.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속도로.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면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가득한 채로.
쉬운 삶은 없다. 쉬운 멍에만 있을 뿐이다.
--- pp.109-110
예수님의 일정표는 늘 꽉 차 있었다. 때로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물론 좋은 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절대 서두르시는 법이 없었다. 예수님은 언제나 현재 순간에 집중하고 하나님, 다른 사람들, 예수님 자신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셨다. 천성이 느긋해서가 아니었다. 와이파이가 없던 옛날 시대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삶의 방식이 달라서다. 모든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 주신다.
--- p.115
예수님 따르는 것을 중심으로 우리의 일정과 습관을 조정하지 않은 채 관계의 성장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도제 수업은 실제 삶이 아닌 개념의 수준에만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우리가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내가 삶의 규칙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 원칙들을 가르칠 때마다 똑같은 후렴구가 들려온다. “다 좋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요.”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요.” “일이 바빠서 시간이 없어요.”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요.” “요즘은 마라톤 훈련을 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내가 워낙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좋아해서요.”
솔직히 다 변명이다. 하지만 이해한다. 나도 같은 세상에서 살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이 어색한 순간을 그냥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조금 부담감을 줄 만큼 얼굴이 두꺼워졌다. 당신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정말 그런가요? 텔레비전은 몇 시간 동안 보시나요?”(이렇게 말하면 대개 분위기가 더 어색해진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죠? 쇼핑에는?” 일주일 동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기록해 보길 바란다. 그렇게 하면 당신이 쓸데없는 것들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지 ‘충격’을 받을 것이다.
--- pp.119-120
훈련은 힘을 얻는 방법이다. 영적 훈련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현재 ‘직접적인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결국 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영적 훈련도 힘을 얻는 방법이다. 하지만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힘(의지력)을 사용할 뿐 아니라 자신보다 훨씬 더 큰 힘, 즉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영적 훈련은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p.127
따분함은 기도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찾아오는 따분한 순간들은 주변에 가득한 하나님의 현실에 깨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자신의 영혼에 깨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하나님께로 다시 마음을 향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바쁨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이제 이런 순간은 다 사라졌다. 디지털 맹수가 이 귀한 순간들을 삼켜 버렸다. 조금이라도 따분함이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스마트폰을 향해 손을 뻗는다. 새로운 뉴스를 확인하고, 이메일에 답하고(‘전체 답장’을 클릭), 도널드 트럼프의 트윗에 관한 트윗을 읽고 나서 트윗을 날리고, 오늘 날씨를 확인하고, 새로운 신발을 검색하고, 자연스럽게 온라인 게임에 접속한다.
… (중략) … 정신을 팔 것이 많고 더없이 바쁜 이 디지털 세상은 우리에게서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능력을 앗아 가고 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능력.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능력.
우리 세상의 좋고 아름답고 참된 모든 것에 집중하는 능력.
우리 자신의 영혼에 집중하는 능력.
--- pp.134-135
예전에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읽고서 ‘와우, 예수님은 정말 영적이시군. 밤새도록 기도를 하시니까 말이야!’라고 생각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밤새 기도하신 ‘이유’를 눈여겨봐야 한다. 그때가 홀로 조용히 계실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틈이 없을 만큼 바쁘셨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제들을 모두 보내고서 밤새도록 산에 머무셨다(여기서는 ‘에레모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한밤중의 산꼭대기는 에레모스의 조건을 완벽히 충족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잠보다 훨씬 중요함을 아셨다. … (중략) … 대개 우리는 정반대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삶이 바빠지고 정신이 없어질수록 한적한 곳으로 가는 시간이 줄어든다. 조용한 곳에서 오로지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기도하고, 시편을 읽고, 내면을 돌아볼 시간이 사라진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몸을 따라잡을 시간이 사라진다. 하지만 바쁠수록 조용한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 pp.143-145
SNS는 이 문제를 한 차원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매일같이 이미지들의 폭격을 받고 있다. 이 폭격은 마케팅 부서들로부터만 날아오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과 유명인들, 심지어 우리 친구들과 가족들까지 최상의 순간들을 찍은 사진들로 우리를 불만족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 모두는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죄를 부추긴다. 바로, 시기심. 자신의 삶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탐욕스럽게 갈망하는 것.
인간 본연의 불만족과 디지털 시대가 만난 결과는 전 세계적인 정서적 질병과 영적 죽음이다. 그렇다면 이 끝없는 불만족의 고리를 끊고 예수님의 쉼을 얻게 해 줄 습관이 있을까?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물론 답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다.
--- p.165
애굽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지금 우리는 애굽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이’를 외치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 활활 타오르는 탐욕의 문화. 모든 것을 요구하는 문화.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음료, ‘더 많은’ 옷, ‘더 많은’ 전자기기, ‘더 많은’ 앱, ‘더 많은’ 물건, ‘더 큰’ 집 크기(혹은 ‘더 많은’ 건물 소유),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해외여행을 갈망하는 세상. ……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이 했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안식일은 “저항의 행위”다. 안식일은 바로와 그 제국에 맞서는 반항의 행위다. 서구 세상의 온갖 “주의”(ism)들에 맞서는 반란이다. 글로벌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 이 모두는 듣기 좋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를 노예로 만든다. 안식일은 자유인으로 남기 위한 길이다. 노예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길이다. 더 중요하게는, 노예를 부리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한 길이다. …… 안식일은 “이제 충분해!”라고 말하는 행위다.
--- pp.184, 187-188
미니멀리즘은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봄마다 창고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틈만 나면 옷장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다. 마트에서 종이박스와 테이프를 사 오는 것이 아니다. 곤도 마리에가 훌륭한 책을 써 내긴 했지만 나는 ‘정리’가 미니멀리즘과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여러 종이박스에 정리해 넣고 쌓아 두어야 할 만큼 물건이 많다면 물건이 너무 많은 것이다(샌프란시스코나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 산다면 열외다). “필요한 것만 있어서 정리할 필요가 없다면?” 생각할 가치가 있는 질문이다. … (중략) … 목표는 옷장이나 창고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근심을 낳고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쓸데없는 잡동사니들을 제거해야 한다.
--- pp.2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