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생각하느냐고 김지금이 물었다. 천지영은 고개를 들고 김지금을 보았다. 내내 입어 구겨진 환자복이 김지금의 어깨에 헐렁하게 걸려 있었다. 예전보다, 아주 예전보다 목이 가늘어 보였다. 여러 사람과 여러 번의 세탁을 거친 환자복은 색이 바랬고 김지금의 팔에 연결된 링거 줄엔 주삿바늘에서 역류한 핏방울이 몇 점 번져 있었으며 김지금의 손목엔 어떻게 떼어낼지 천지영으로선 엄두도 나지 않도록 겹겹으로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천지영은 입을 다문 채 연인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느냐고?
기도를 생각해.
강영은을 생각해.
부끄러움을 생각하고.
사랑을 믿는다고, 내가 어떻게 단숨에 말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 「올빼미와 개구리」 중에서
미란 씨는 무언가를 나중에 잃는 것보다 처음부터 없는 게 나은 것 같다고 했었죠. 나중에 잃게 되는 건 너무 가슴 아프다고요.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난 나중에 잃는 것을 선택할 거예요. 그건 두 세계를 살아보는 거잖아요. 어쩌면 세 세계인지도 모르죠.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 나는 나한테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고 싶어요.
--- 「모린」 중에서
희강은 조금 떨면서 말했다.
“꼭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요.”
그 말은 엄마 같다는 말보다 훨씬 슬펐다.
나처럼은 안 돼, 라는 말이, 울음이 터질 듯 부풀어 좁아진 목 안을 자꾸 더듬어 나오려 했다. 왜요, 라고 묻겠지. 나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나처럼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겠지. 저주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 애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꼭 나처럼 되렴 하고 별 마음 없는 덕담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저주일 거라는 사실을 내가 아니까. 거의 평생을 소년의 목소리로 살고, 그걸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까지 쳐야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끝내 희강의 손을 다시 잡지는 못한 채로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그쯤에는 손을 잡으려는 마음이 내 욕심일 뿐이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해져 있었다.
--- 「젤로의 변성기」 중에서
“서퍼들은 파도에 이름을 붙여. 파도가 오는 방향, 속도에 따라 이름이 달라.”
컬러 프린팅된 광택지를 한 장씩 넘기는 소리. 여러 등분으로 접혀 있는 종이를 펼치는 소리.
“리폼, 이건 부서졌다 다시 물보라가 생기는 파도야. 클로즈아웃, 이건 갑자기 부서지는 파도. 더블업, 이건 두 개였던 파도가 하나로 이어지는 거.”
잠시 침묵.
“근데, 난 그게 그거 같아.”
과카몰레의 말에 엘리가 웃는다. 웃음소리가 안 들려도, 엘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느낄 수 있다. 엘리 네가 웃었다는 걸. 비치볼에서 바람이 새어나가듯 널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며 널 웃게 했다는 걸.
--- 「논리」 중에서
은영은 엄마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소파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든 엄마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반쯤 비운 소주병과 잔이 놓여 있었고,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었다. 은영이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은영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자 엄마는 가만히 은영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엄마가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자.”울음을 그치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은영은 맑은 희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사랑해서 괴롭지 않았어?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수치스럽지도, 두렵지도 않았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어? 네 사랑이 너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지 않았어? 네 사랑이 네 가족을 울게 하지 않았어?
네 사랑은 아프지 않지. 네 사랑은 밝고 빛나지. 너는 환하게 웃고 떳떳하게 울지. 눈치 보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지, 네 사랑은.
--- 「외출금지」 중에서
레몬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샐리이면서도 때로는 샐리 바깥에서 나 자신을 지켜보곤 했다. 그 애는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관찰했다.
샐리의 몸에서 문득 이질감이 느껴졌다. 왜 이 몸은, 이런 근육과 뼈를 지녔을까. 가슴이 여기에 붙어 있는 것이, 몸이 이런 형태의 굴곡을 이루는 것이, 전부 어색했다.
그 애는 왜 바다 깊은 곳을 좋아했을까.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곳.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신경 쓰지 않는 곳. 아무도 나에게 너는 왜 그런 존재냐고 묻지 않는 곳. 그곳에 사는 생물들에게 나는 그냥 거대한, 혹은 조그마한 외계 생물체일 뿐인…… 그런 곳이어서.
그 사실이 편안해서.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 「양면의 조개껍데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