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온 인류가 진저리가 날 만큼 또렷이 기억할 만한 해였지만, 2019년 말에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폭풍 전야가 실제로 고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2020년 전야는 고요했다. (...) 유례없는 팬데믹과 록다운 속에서도 인종, 여성, 기후위기, 과학기술의 발달 등 크고 중요한 어젠다가 쉴 새 없이 전면에 등장했다. 매일 ‘오늘은 무슨 일이 터졌을까’ 하는 걱정에 뉴스를 보기 힘들었지만, 바로 그런 걱정 때문에 안 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뉴스 피로 현상을 호소했지만, 언론사들은 최고의 매출 기록을 세웠다.
--- 「Prologue」 중에서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과 동시에 넷플릭스가 다큐멘터리 〈팬데믹(Pandemic: How to Prevent an Outbreak)〉을 내놨다. 도저히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어서 찾아보니 미리 만들어 놓고 대형 전염병이 터지기를 기다린 것 같다. 언론 기사도 이번 사태에 맞춰서 보도했다고 나온다. 마케팅이 너무 나간 거 아니냐는 말을 하는 시청자들도 있다. 사실 이 다큐멘터리의 주장이 ‘팬데믹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It’s not a matter of if, but when)’니까 넷플릭스는 곧 터질 걸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모든 경우에 대비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놓고 최적의 시기에 풀어 놓는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로 넷플릭스는 영리한 마케팅을 한다.
--- 「팬데믹은 시간 문제」 중에서
내 어머니는 아들이 4개의 신문에 칼럼을 써도 정작 당신이 구독하는 신문에는 쓰지 않는다고 항상 불만이시다. 이번에도 아쉬워하시길래 이렇게 말씀드렸다. “한겨레는 로컬이에요.”아카데미를 디스한 봉준호 흉내를 내 본 건데, 알아들으신 것 같지는 않다.
---- 「봉준호 따라 하기」 중에서
딸아이와 쇼핑몰을 걷는 중에 내가 페이스북을 체크하는 걸 아이가 봤다.
딸 와… 아빠는 아까운 데이터를 페북하는 데 쓰는구나(You’re using precious data just scrolling Facebook? Wow) ?
나 팔로어가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But I need to check the growing number of new followers)!
딸 자존감을 얻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거 같아, 아빠(You need different sources of self esteem).
--- 「78 데이터가 아까워」 중에서
금요일 오후에 트럼프가 국가 재난 사태를 선포했는데, 눈에 띄는 장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미 많이 늦은 검사를 빠른 속도로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시행한 검사에 따르면”이라고 언급했다. 게다가 이번에 발표한 검사 방법이 드라이브 스루 검사다. 한국의 코로나19 대책이 이제 미국에서 따라야 할 표준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함께 발표한 대책에서 구글, 월마트, CVS, 제약회사들과 함께 하겠다면서 각 기업 대표자를 일일이 소개하는 기괴한 장면이 펼쳐졌다. 미국인들의 반응. “이건 중간 광고야? ”
---- 「국가 재난 사태」 중에서
나는 내 딸이 사는 세상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앞선, 가장 평등한 세상일 거라고 기대한다. 객관적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딸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이 들어 죽을 때까지도 남녀가 완전히 평등한 세상에서 살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다. 지금보다 훨씬 불평등한 세상에서 태어난 나처럼, 이 아이 역시 불평등한 세상에 태어났고 그런 세상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동등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보다 훨씬 더나쁜 조건에서, 더 큰 불평등을 겪으며 일생을 살 사람들은 훨씬 더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혹은 과거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태어나서 산다는 사실이 내 딸이 현실에 만족해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가 계속해서 완전한 성 평등을 요구하고 싸우기를 바란다. 평등과 인권에 대한 요구는 항상 ‘지금 당장’이어야 한다.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말, 다음 세대는 더 나은 세상에서 살 거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떠나는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이야기이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영원히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공허한 약속에 불과하다. 우리는 (윤회설을 믿는 게 아니라면) 모두 한 번만 살기 때문이다
--- 「칼럼2. 딸에게 평등한 사회」 중에서
“케이크 위 촛불을 훅~ 불고 다 같이 나눠 먹던 거 기억나? 그땐 뭔 생각으로 그랬나 몰라.”
--- 「이제는 다 옛날이야기」 중에서
드디어 트럼프와 바이든의 첫 대선토론회가 열렸다. 그러나 토론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선거 결과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라는 게 대다수의 전망이다. 유권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마음을 굳혔고, 역대 최고의 사전 투표율을 기록 중이다. 토론은 작동을 멈추고 껍데기만 남은 미국 민주주의를 보는 쓸쓸한 행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트럼프가 계속 끼어들며 말을 끊자, 바이든이 결국 “이봐, 입 좀 닥치지 않겠나(Will you shut up, man) ? ”라고 말했다. 이게 대선토론이 맞나 싶다.
--- 「이봐, 입 좀 닥치지 않겠나 ?」 중에서
워싱턴의 국립동물원에서 올해 태어난 판다 이름을 샤오치지(小奇迹, 작은 기적)라고 정했단다. 엄마가 스물두 살 최고령이고, 2020년은 기적이 필요한 해였으니까. 나는 좀 아쉽다. 믹(Mick)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놓친 거다. Panda. Mick. Panda Mick.
--- 「판다, 믹!」 중에서
스탠퍼드 대학 병원 의료진이 시위를 하고 있다. 이 병원에 코로나19 백신이 5천 개 배정되었는데, 그중 코로나19를 검사하기 위해 환자를 직접 만나야 하는 레지던트들에게는 달랑 7개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바이러스에 노출될 가능성이 적은 의료진, 즉 코로나 음성 판정을 받은 환자를 만나는 의료진, 고위직 의사, 그리고 환자를 만날 이유가 없이 재택근무를 하는 관리직에게 배정되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자 스탠퍼드 병원 측은 ‘알고리듬에 의해 선정된 것’이라는 변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리듬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편견을 반영하는 것일 뿐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핑계가 될 수도 없다.
--- 「그걸 핑계라고」 중에서
워싱턴 포스트가 독자들에게 2020년을 설명하는 단어나 문장을 보내 달라고 했는데, 아홉 살짜리가 이런 글을 보내왔다고 한다. “양쪽을 모두 확인한 후 길을 건너다가 잠수함에 치인 듯한 기분(It’s like looking both ways before crossing the street and then getting hit by a submarine).” 그 밖에 올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표현 하나. “마이크 꺼져 있어요(You’re on mute).”
줌 회의 때마다 반드시 한 번은 듣게 되는 말.
--- 「올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표현」 중에서
2020년은, 아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팬데믹은 별생각 없이 살고 있던 인류에게 우리가 그동안 누리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몹시 위태로운 기둥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었음을 깨닫게 해 줬다. 누군가는 분명히,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희미하게는 알고 있었던 이 사실은 우리 세대가 처음 겪는 팬데믹 기간 동안 적나라하게 눈앞에 드러났고, 우리는 더 이상 이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는 경고음을 모두가 분명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경고음이 과연 한 행성에 사는 공동체로서 인류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까 ?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를 보강하고, 인종주의를 극복하고, 힘을 모아 기후위기와 싸우게 될까 ? 시간만이 답할 수 있겠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 「Epilogue」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