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과거로부터 멀어졌고, 살아가는 동안 계속 삶을 지워갔다. 어차피 모든 건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 치는 편을, 미리 도망치고, 단념하고, 거부하고, 잊어버리는 편을 선호했다. 그런데 이제껏 악착같이 확보해놓은 이 휑한 공백이 내 마음에 깃든 슬픔으로부터 전혀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내가 남자였어도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 「2」 중에서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판단 따위의 노예가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해왔다. 젊었을 땐 사회가 강요하는 명령 같은 건 거부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런데 이제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지난 몇 해 전부터인가 나는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자기 검열에 해당한다. 정말이지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는 중이다.
--- 「7」 중에서
나는 늙은이가 되어버린 그 여름에 불현듯 맛본 그 향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거의 아무도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며, 대개는 관심조차 없다. 나는 늙는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기도 하다고, 다음 세대들에게는 폐기 처분해야 마땅할 것으로 보이는 나의 젊은 시절을 한껏 이상화하며 되새김질하는, 그런 것이기도 하다고 속으로 삭였다.
--- 「9」 중에서
늙은이가 되어버린 이후로, 나는 벌써 오래전에 비교적 평온하게 돌아가신 내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젊은 시절을 온통 두 분에게 반항하는 데 바쳤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전엔 알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
--- 「12」 중에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 나는 내가 늘 되고 싶었고, 늘 그렇게 머물러 있고 싶어 했던 젊은 여성,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축소되기를, 단 하나의 의미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여성을 저버렸다. 나는 이곳이 나의 뿌리이며, 나 자신이 이 허약하기 그지없는 뿌리에 속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나의 노년과 죽음을 그 뿌리에 의지하기로 결심했음을 깨달았다.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 이방인으로 남으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지만 말이다.
--- 「14」 중에서
우리의 우정이 처음으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 같은 시련에 봉착하게 된 건 친구들이 아기를 낳고, 그로 인해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 찾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렇게 되자 친구들은 육아라고 하는 새로운 일, 새로운 발견, 새로운 책임으로 전전긍긍하게 되었는데, 그것만은 내가 함께 나눌 수 없는 경험이었다. 결국 나는 10년 정도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예전의 친구들을 완전히 되찾았고, 우리가 함께 공유한 삶의 끈, 잠시 느슨해졌지만 결코 돌이킬 수 없이 끊어져버리지는 않았던 그 끈을 다시금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대략 10년쯤 전부터 우정의 두 번째 사막을 가로지르는 중인데, 이름하여 ‘할머니 정체성’에서 기인하는 사막이다.
--- 「15」 중에서
나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 행동, 내가 저지른 실수, 내가 한 노력, 나의 투쟁, 내가 거둔 승리, 내가 느낀 슬픔, 내가 받아들인 모험, 내 생각, 내가 쏟아낸 말,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천당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 지난 70년 세월 동안 나는 그럭저럭 살 생각만 해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여정의 끝을 상상하려니, 그냥 상상이 안 ㅋㅋㅋㅋㅋㅋ된다. 모든 것의 뒤에 공백만 이어질 거라니. 그러면서도 약간의 호기심이 가미된 불안한 마음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어떻게 올까?
--- 「18」 중에서
우리는 자정이 되도록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나는 두 개의 나로 분리되었다. 하나의 내가 말하고 웃고 와인을 마시는 동안 나머지 하나의 내가 우리 두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아직 서른 살도 안 되었을 때, 우리는 인생에서 그토록 많은 일이 일어나며, 특히 어느 날 문득 우리가 그날 저녁의 우리 모습으로-그러니까 고만고만한 여사님이 되어-파리의 웬 식당에 반려견까지 데리고 나와 앉아있게 되리라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 「20」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