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출발선이 다르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출발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착점이다. 내가 어떤 길을 만들며 지금 여기 머물고 있는지, 내가 도착할 종착지는 어디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출발선은 내가 그을 수 없지만 도착점은 내가 정할 수 있지 않은가? 세상의 길은 하나가 아니다. 길은 언제나 사람 수만큼 있고, 나는 나의 길을 만들 수 있다. 세상이 ‘이게 너의 한계’라고 말할 때마다 기억하자. 나는 내 삶의 영역을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으며, 내 인생의 지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걸.
--- 「내 인생의 길은 내가 정한다」 중에서
다산은 윤종진이 늦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나이 들어 낳은 자식이기에 부모의 좋은 기운을 마음껏 받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몸집은 작아도 그의 정신과 마음은 거인과 같다며 제자를 추켜세웠다. 윤종진에게 고대 전설의 거인이었던 교여와 키가 10척이나 되었다고 전해지는 거무패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정신과 마음을 지녔다고 칭찬했다. 작고 가녀린 제자에게 키가 3미터가 넘는 거인과 비교해도 그 정신은 뒤지지 않는다며 격려한 것이다. 또, 스스로 작다는 생각을 버리고 뜻을 세우고 힘을 쏟아 큰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하늘도 작다는 이유로 덕을 이루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라고 일렀다.
--- 「스스로 아름다움을 정의하자」 중에서
우리는 다산이 살았던 때보다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일을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정보가 오가고 주변의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한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신경을 뾰족하게 세우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쉼을 선택하지 못한다. 언제나 ‘이것만 끝나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붙인다. 그러나 ‘이것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의 ‘이것만’이 끝나면, 꼬리를 물고 있던 다른 ‘이것만’이 따라오고, 그 뒤에 또 다른 ‘이것만’이 따라 들어 온다. ‘이것만’들 사이에 강제로 쉼표를 넣지 않으면, 결코 멈춰 설 수 없는 이유다.
--- 「직진만 하지 말고 잠시 멈출 것」 중에서
또 다산은 허름한 달동네에서 검소하게 생활했던 학자 안연과 전쟁이 일어나자 재산을 모두 털어 군비를 마련해 출정했다가 절개를 지키며 죽은 문천상은 사람들이 기리지만, 평생 부를 누리며 살았던 석승과 풍도는 모두가 비난한다고 적었다. 누군가에게 칭송을 받는 것은 ‘나의 괴로움’에서 시작되며,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은 ‘나의 즐거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뜻이었다.
--- 「배움을 통해 확장되는 세계」 중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유는 ‘잘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기 위해서’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다 보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후회로 점철된 삶이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고 이야기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고, 그때까지 삶을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 그러니 내게 허락된 시간을 즐기며 언젠가 닥칠 죽음도 조금씩 준비해 보자. 살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는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나만의 비법이 될 것이다.
---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중에서
다산은 오랫동안 세상에 남을 책을 쓰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속세에 있을 때 선배들이 쓴 책 중에 왜 어떤 글은 추앙을 받고, 어떤 글은 배척을 받는지 거듭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먼 길을 떠나와 홀로 머물며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옷매무새를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 인형인 양 흐트러짐 없이 의젓하고 엄숙하게 지내는 생활 습관이 글에 녹아 나오는 것이라고,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고 이름을 오래 오래 퍼뜨릴 수 있다고 말이다.
---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법
누군가의 은혜를 기대하지 말라던 다산은 이제 거꾸로 두 아들에게 주변을 살펴보면 여러 날 동안 밥을 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약간의 곡식이라도 나누어 그들은 구제했느냐고 묻는다. 나아가 눈 속에 쓰러진 사람에게 장작을 피워 따뜻한 온기를 나누었는지, 병들어 약을 먹어야 하는 사람에게 약값을 보태어 주었는지, 가난한 노인이 있는 집에 찾아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있는지, 근심 걱정이 쌓인 집에 가서 그들의 고통을 나누려고 노력한 적 있는지 하나하나 따져 묻는다. 그 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들이 너희에게 베풀 것을 기대할 수 있느냐며 혼쭐을 낸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렇게 베풀었으나 상대방이 돕지 않는다 해도 공치사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면 그동안 쌓았던 공덕이 재가 흩날리듯 날아가 버린다고 말이다.
--- 「주고 또 주는 삶」 중에서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어린아이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자고로 ‘어른’은 울면 안 되고,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어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들 앞에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남들에게 꼿꼿했던 다산도 가족들에게는 슬프고 그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가족에게만은 솔직하게 표현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것이 혹독한 유배지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를 짓누르는 어떤 아픔을 견디고 있다면, 누군가 툭 치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면 참지 말고 울어 보자.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아플 때 아프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를 ‘사람처럼’ 살게 한다는 걸 믿으면서.
--- 「슬플 때는 슬퍼해도 괜찮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