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감과 마주해야 했다. 허무와 고통, 혼란과 어둠 앞에 내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학교에 있는 이점을 활용하기로 했다. 여러 책을 읽고 토론하는 ‘삶의 의미: 허무와 고통, 기쁨과 보람’이라는 강의를 개설하여 삶의 의미에 관한 여러 견해를 살폈다. 뇌과학부터 종교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에 관한 모든 논의를 정리하려 애썼다. 그러다가 서서히 생각이 갈무리되었다. 몇 년 전부터 그 강의를 더 이상 개설하지 않는다. 큰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성서의 지혜문학은 신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지혜문학이 난센스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나 있는 ‘경건’ 혹은 ‘신비’ 등으로 부분적으로 대치할 수 있다. 우리에게 우주의 크기와 역사의 넓이 앞에 고개 숙이는 태도와 감정이 있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와 부끄러움이 있다면, 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나의 이기적인 주장을 돌이키려는 자세가 있다면, 곤경에 빠진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선뜻 내미는 손길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경건’ 혹은 ‘신비’라고 부르며, 이로써 지혜문학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자기계발서의 저자들도 자기계발서를 읽고 성공했다고 말하는 건 좀처럼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어떤 작가는 몇 년에 걸쳐 자기계발서를 읽은 뒤 그것들을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책의 저자도 책의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나쁜 자기계발서와 좋은 자기계발서를 구분한다.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지혜의 한 측면이 ‘자기’와 관련되어 있음은 분명하고, 지금의 ‘나’는 여전히 개간의 여지가 남은 황무지다. 자기를 계발 혹은 개발하는 게 나쁠 리는 없지 않은가. 다만 많은 자기계발서의 문제는 삶의 문제와 해결 방식을 단순화하거나 ‘좋은 삶’에 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 「1장 지혜란 무엇인가」 중에서
파스칼처럼 윤동주도 하늘을 본다. 그런데 그는 하늘을 그저 보지 않고 ‘우러른다’. 그런 그에게 불쑥 드는 감정은 부끄러움, 곧 수치다. 부끄러움은 이내 괴로움을 동반한다. 참 묘하다. 마치 그가 ‘우러르는 하늘’은 그에게 어떤 도덕적 질서 혹은 윤리적 태도를 가르쳤나 보다. 시인은 부끄럼과 괴로움을 토로하고 끝나지 않는다. 그는 ‘별’을 ‘노래’한다. ‘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두고는 해석이 분분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그가 우러르는 하늘에 있는, 그가 간절히 바라보는 무언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 「2장 혼돈과 어둠을 이기는 지혜, 『잠언』」 중에서
20 어찌하여 하느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 그들은 보물을 찾기보다는 죽기를 더 바라다가 22 무덤이라도 찾으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23 어찌하여 하느님은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시는가?
--- 「3장 고통에 맞서는 고귀한 지혜, 『욥기』」 중에서
코헬렛이 깨달았다고 외치는 지혜는 우리가 마음 쓰는 삶의 범위를 줄이라는 권고다. 호라티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내일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코헬렛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가지론, 곧 사후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3:18-21) 흘러간 과거는 물론이고, 앞으로 닥칠 일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코헬렛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초점을 두라고 가르친다.(3:12)
--- 「4장 덧없는 삶을 즐기는 지혜, 『전도서』」 중에서
지혜자는 자연을 둘러본다. 아름다운 꽃, 맑은 하늘, 넘실거리는 강, 곳곳에 있는 나무,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 멀리 떠가는 구름, 지저귀는 새 등 이 모든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나는 그것들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게 없다.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내게 주어졌다. 아기였을 때 무슨 특별한 보상을 받을 만한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육자는 아기를 정성으로 돌본다. 사회로 진입할 때도 소속할 그곳을 우리가 만들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곳에서 살고 번영한다. 이전 세대의 노력으로 탄생한 ‘사회’에서 우리는 덕을 본다. 물론 자연과 사회가 우리를 억압할 때도, 착취할 때도 있다. 누군가는 존재 자체가 버겁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이 혼돈과 고통과 허무 속에 우리를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괴물들에 맞서 의미와 품격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주어진 삶을 긍정하고, 나아가 감사하면서 자신을 빚어내라는 야고보의 격려를 듣는다. 그는 이것을 ‘위로부터 온 지혜’라고 말한다.
--- 「5장 삶을 조소하는 지혜, 『야고보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