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는 내용을 통해 그들의 거짓 평안을 부수는 와중에도, 주전 587년에 일어난 재난의 절정 한가운데서도, 특히 이스라엘을 향한 희망과 축복으로 가득한 미래의 비전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디서나 일하시며 그분의 선교 범위는 세상 전체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두 가지 요구, 곧 우상숭배를 버리고 언약적 신앙의 철저한 일신교(monotheism)로 돌아오라는 요구와, 길을 돌이켜 언약의 윤리를 따르라는 요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 선교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되고 살아 계신 창조주이자 구속자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오직 그분을 알고 그분을 전파하며 이 세상에서 구별된 윤리적 삶을 사는 데 헌신하기를 요구하신다. 이것이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선언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갖는 핵심적인 의미다. 이스라엘이 야웨가 하늘과 땅에 계신 하나님이고 다른 이는 없으며, 그분의 길을 걸음으로써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의미다. 예레미야서는 선교적 일신교 신앙과 선교적 윤리에 관한 끈질긴 권고다.
---「서론」중에서
독자는 이 책이 아나돗 제사장들 중 한 사람에 대한 전기도 아니고, 유다 왕국 마지막 시기의 왕들에 대한 역사 기록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이 제사장들 및 왕들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책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말로 표현한 책이다. 이 책은 사람의 말이자(1절) 동시에 주님(“여호와”)의 말씀(2절)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발견하는 가장 매력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사람과 말씀과 주님의 정체성이 본문의 열정과 격한 감정(pathos) 속에서 계속 번갈아 가며 함께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속속들이 스며 있기 때문에 앤드루 쉬드는 하나님의 말씀이 책 전체에서 살아 있고 활동하는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로 사실상 의인화되었다고까지 주장한다.
---「1장 시작…그리고 끝」중에서
예레미야의 사명은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섬김의 길이 아니라, 예레미야가 어머니의 태에서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심중에 계획하신 그분의 목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를 지었노라”는 구절에 나오는 첫 동사부터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음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토기장이가 자신의 뜻대로 그릇을 만들 때 흔히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나중에 이 단어를 열방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징하는 강력한 은유로 바꾼다(18:1-12). 여기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생물학적 형성을 친히 감독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2장 예언자로 임명된 예레미야」중에서
이번 본문은 신혼에서 시작하여(2:1-3) 이혼으로 끝난다(3:1-5). 향수에 젖게 하는 시작과 가슴 아픈 결말은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관계적 성격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법정에서 울리는 화법이 사용되며(특히 2:9에서 시작되는 범죄 목록에서), 예레미야의 이 화법은 이전의 다른 예언자들이 탁월하게 보여 주었던 익숙한 ‘언약 법 소송’(covenant law-suit)과 연결된다. 그러나 핵심적인 질문은 율법 위반만이 아니라(이것도 포함되지만) 깨어진 관계, (이스라엘에 대한) 깨어진 약속, (하나님의) 깨어진 마음이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신랄한 비난, 가혹한 경고, 으스스한 위협을 포함하지만, 이것들은 하나님의 고통?배신당한 사랑의 고통과 분노?을 쏟아 내는 격렬한 슬픔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레미야서를 읽는 동안 이 점을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혹독한 비난과 심판의 구절을 엄청나게 많이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장면은(예레미야의 눈물이 그러하듯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자 남편이신 하나님이며, 그분의 분노는 사랑의 고통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3장 신혼에서 이혼까지」중에서
그 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이었고, 그 약속에 따라 그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 땅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의 신실하심을 기념하는 구체적인 증거였다(7b절). 그런 의미에서 선물은 무조건적이었다. 그들은 그 땅을 가질 만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로 그 땅을 얻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곳은 여전히 야웨의 땅이었다. 그분은 땅의 신성한 주인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결정하셨다(5-7a절). 그 조건은 언약적 율법에 복종하고 경제, 사회, 정치, 법률, 종교 등 삶의 모든 차원에서 정의와 긍휼을 행하는 백성으로 서로 함께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땅을 안전하게 누리는 조건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땅에 거하려면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경고를 받았다.
---「6장 성전 설교」중에서
이 이미지는 놀랍다. 하나님은 옷처럼 자기 백성을 입기를 원하셨다! 외투를 어깨 위로 느슨하게 걸친 모습이 아니라 몸에 꼭 맞게 달라붙은 허리띠처럼 입기를 원하셨다. 비단 보온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랑삼아 보여 주기 위해 입기를 원하셨다.…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입고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하셨다. 이를테면, 공동체 전체로서 이스라엘이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께 자랑거리가 되고 열방 가운데 가시적으로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 줌으로써 야웨의 이름이 찬송과 경배를 받게 될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보고 그들이 예배하고 소속된 하나님을 흠모해야 한다(참고. 신 4:5-8). 우리가 아름다운 옷을 칭찬할 때 그 칭찬은 실제로는 그것을 입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9장 입을 수 없는 백성, 견딜 수 없는 미래」중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고뇌하는 정직함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며 치유하는 질책과 온유한 회복의 말씀을 주신다(19-21절). 정직은 치유로 가는 첫걸음이다. 회개가 없다면 치유도 없다. 그리고 정직이 없다면 회개도 없다. 비록 그 정직한 말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분노, 질문, 자기연민이 있다 해도 말이다. 예레미야의 자기연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를 다시 19절로 데리고 간다.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가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에 대해 비난하지 않으시고 그가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돌이키라고 요구하신다.
---「11장 자기연민의 구덩이」중에서
전체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이 최종 결과에 대해 계속 주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람이 그분의 말씀에 반응하는 방식을 충분히 고려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결정론적 성격의 절대적인 하나님의 통치 관계도 아니고, 계획이나 통제가 전혀 없는 관계도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선택에 응답한다.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이 자기 계획을 실행하시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아니면 브루그만이 표현하듯이, 우리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자유롭게 응답하실 수 있으며…유다의 불순종은 매우 결정적일 정도로 중요하다. 이 두 가지 단언에 비추어 유다는 어떻게 행동할지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권유받는다. 유다의 미래가 자신들의 행동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야웨의 반응적 주권과 유다의 결정적 순종이 모두 유다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다.” 반응적 주권(responsive sovereignty)은 여기서 설명된 내용을 포착하는 탁월한 표현이다.
---「14장 그릇과 음모」중에서
24장은 유배의 심판을 예고하지만 그 이후의 희망도 제시한다. 신명기 30:2, 10에서 백성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반드시 돌아와서 전심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는다. 이것이 그들이 회복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구절의 중심인 6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자신들을 위해 행하라고 명령받았던 (그러나 할 수 없었던) 일?즉,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고 그리하여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사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을 백성을 위해 친히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근본적인 명령이요 요구였다(신 6:4-5). 그러나 신명기 30:6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했던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이 놀라운 구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다(그도 그럴 것이 이 구절은 복음적 결말을 갖고 있다. 신 30:19-20). 선물과 요구 사항의 동일한 역설적 결합이 예레미야 24:7에서 나타나며, 이것은 31:31-34의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가리킨다.
---「18장 좋은 것, 나쁜 것, 추한 것」중에서
위로의 책 첫 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신앙의 위대한 전통이 새로운 시대를 위해 이용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다윗과 맺으신 언약, 출애굽 때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행위. 이 모든 것은 이 시들이 제시하는 약속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이용된다. 이 위대한 성경적 진리는 1지평에서 후세대가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실제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시켜 준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2지평과 3지평에서 더 멀리 복음적 현실과 종말론적 소망을 내다보게 한다.
---「22장 놀라운 은혜」중에서
이것은 예레미야가 앞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새겨진 것?즉, 그들의 죄(17:1)?으로 묘사한 내용을 뒤집고 근본적으로 바꾼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고질적으로 깊이 새겨진 것 때문에 부끄러움 없이 죄를 지었지만,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그들은 순종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친히 그들 안에 새로 기록하실 법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하나님이 ‘새로운 법’을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법의 본질에 내부로부터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다.
---「24장 새 언약」중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시기에? 죄악으로 점철된 과거가 피할 수 없는 현재와 충돌하는 바로 이 시점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미래에 투자를 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대단원은 바빌론 군대를 통한 하나님의 진노인가? 아니면 새로운 구속 행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인가? 이 순간 예레미야는 틀림없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답은 둘 다였다. 온 땅의 심판자는 오직 진노와 구속을 모두 행하심으로써?그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 없으시다?의를 행하신다. 종종 그렇듯이, 이러한 역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 가운데 놓일 때 비로소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 적(로마 병사들)의 폭력적인 악을 통해 이루어졌지만(하나님의 아들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감당하셨다), 그와 동시에 구속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한 오래된 땅에 농사를 회복시키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조 세계 전체에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25장 꿈속의 밭」중에서
성경 전체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한 목적을 지향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 인간의 악행과 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 다가올 최후 심판과 그 너머의 새로운 창조 세계에 대해 말한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용서를 받고 성경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영원한 미래에 참여하라고 요청한다. 되풀이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주전 605년에 예레미야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메시지를 들었던 유다 사람들에게 이 희망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해 12월 말, 여호야김은 그런 가능성조차도 완전히 없앴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와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한 모든 사람에게 이 ‘아마도’는 복음의 확실한 약속 안에서 사라진다.
---「27장 하나님의 말씀: 불속에 던져졌지만 완전히 타지 않은」중에서
시드기야와 부유하고 유력하며 억압적인 예루살렘의 엘리트 집단은 낮추어져 죽음의 먼지가 되었고, 반면 그 땅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곧 극빈자들은 자신과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재산과 자원을 받았다. 그러나 또 다른 역설이 있다. 누가 이 역전을 이루었는가? 그 대답은 외국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특별히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돌보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것, 곧 경제적 공평과 궁핍한 이들을 위한 공급이었다. 이것은 그 백성이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짓밟은 몇 가지 중요한 언약의 요구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신명기는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이상을 주장했다. 나라 전체를 집어삼키는 비극의 와중에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일시적이긴 했지만, 그 같은 이상을 실현한 이는 이교도 통치자였다. 역설적이게도,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두 세대 동안 포로로 잡혀갈 때, 그들 중 가장 가난한 사람들(그들을 도외시한 것이 심판의 한 이유다)이 마침내 언약적 축복의 가장 구체적인 표시로 자기 몫의 땅을 받았다(또는 돌려받았다). 그들의 정복자로부터 땅을 받았다!
---「29장 예루살렘 함락」중에서
여기에 예언자도 아니었던 사람에게 주어진 작은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바룩의 고통과 그의 좌절된 포부를 인정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나 역시 너와 같은 고통을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느낀다. 그렇지만 나는 너의 야망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바룩에게 그의 근심을 하나님의 무한한 고통 속에 놓고, 그의 야망을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 안에 놓아 보라고 요구하신다. 그렇게 한 후 고통을 참고 사역을 잘 감당하라고 요구하신다.…예레미야는 바룩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계속 바룩?주님의 종을 섬기는 신실하고 희생적인 종이 될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 그들은 무대에 올라 박수갈채를 받지 못하지만, 그들 없이는 드라마가 진행되지 못할 것이다.
---「31장 바룩의 서명」중에서
비유적으로, 정착할 때와 떠나야 할 때가 있다. 예레미야 29장과 50-51장의 메시지 리듬은 신자의 생활 리듬이 될 수 있다. 이 균형은 우리가 자기 의를 위해 세상에서 분리될 위험에서 지켜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세상에 흡수될 위험에서 보호한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곳에서 그분을 섬기고 지역사회의 평안을 구한다. 우리는 정기적인 예배를 통해 ‘바빌론에서 떠나고’ 우리의 진정한 색깔과 궁극적인 미래를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바빌론은 지금 우리의 고향이자 부르심과 사명의 장소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 나라이며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세계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악이 사라지고 구속받아, 세상 나라의 모든 영광과 찬란한 빛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33장 가라앉는 바빌론」중에서
유배자들은 틀림없이 사로잡힌 왕의 석방을 결국에는 나머지 포로들이 포로 상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징조로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감옥 문을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유배는 유다 민족의 종말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실 것이다. 단지 작은 희망의 빛이지만 확실한 빛이다. 다윗을 이은 왕들의 계보」중에서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은 감옥에서 다시 세움을 받았지만 포로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2지평에서 어렴풋이 희미한 빛이 빛난다. 즉, ‘위대한 다윗의 더 위대한 아들’, 여호야긴을 통해 나신 다윗의 진정한 후손(마 1:12)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34장 끝…그리고 작은 시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