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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천선란 | 창비 | 2021년 11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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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05일
판형 반양장?
쪽수, 무게, 크기 392쪽 | 498g | 140*210*20mm
ISBN13 9788936457075
ISBN10 893645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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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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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사는 것에 미련이 없던 미래는 그때부터 한 꺼풀씩 세상의 비밀을 벗겨 먹으며 묵묵히 기다렸다. 그러다 주워 삼킨 세상의 비밀 중 어마어마한 것이 있다면 꼭 서로 털어놓자고 약속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현재도 약속에 동참했다. 믿기지 않을 진실이라도 일단은 서로 믿어 주기로. --- p.26

그러니 방법은 딱 하나다. 세상 일이 신경을 전부 긁기 전에, 더 큰 일이 또 들러붙기 전에 발목에 채인 일부터 빨리 치우는 것이다. 애초에 알지 못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알아 버렸는걸. 그리고 도저히 모르는 체할 수 없는걸. --- p.106

답답하게 사는 게 가능했으면, 아니 애초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짓궂게 장난치는 반 친구들의 코를 때리지 않았을 테고, 그로 인해 숱하게 교무실에 불려 가지도 않았을 것이며, 때때로 부모 없이 자라서 저렇다는 말을 듣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렇지만 나인은 답답하면 못 참는 성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 p.129

나인도 한때 자신이 밤에는 세상을 구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새벽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웅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은밀하게,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는 걸, 아주 평범하거나 혹은 평범하기 위해 아등바등 헤엄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듯이. --- p.218

도현은 경계에 서 있다. 붉은 선의 경계 넘으면 돌아갈 수 없다. 그 경계를 넘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 들려도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고, 보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경계 너머는 현실과 비현실이 혼잡하게 섞인 세계. 피는 꽃처럼 터지고, 길고양이는 솜 인형처럼 느껴지는 부드럽고 잔혹한 세계.
도현이 그 경계의 선을 밟기 전에 누군가가 다시 이곳으로 끌고 와야 한다. 비린 냄새와 어두운 산이 존재하는, 고통이 잇따르는 잔혹하기만 한 세상으로.
그렇지만 내일이 있는 세상으로. --- p.252

“그냥 말해.”
미래의 표정과 말투는 평소와 다를 거 없이 단호했다. 겁을 먹지도, 이 상황을 황당하다 느끼지도, 비웃지도, 지루해하지도 않았다.
“네가 하는 말 다 믿어.”
그러니 이 말은 사실일 것이다. 미래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보였다. 옆에 앉아 있던 현재도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p.280

“그러니 오래 이곳에 있어. 네가 만난 이 세상을 다 누리고, 세상이 변하는 걸 목격하고, 기쁨과 슬픔을 전부 겪고 나서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질 때.” --- p.289

그렇게 어떤 일은, 죽음은, 억울함은, 호소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밀려 세상 밖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걸, 그렇게 사라지지도 분해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로 우주를 떠돌게 된다는 걸 미래는 아직 모른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지만 조금씩 알게 되겠지. 그걸 알아 가는 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도 알게 됐으면 한다.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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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의 소설은 온유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성장소설 속에서도 누구나 성장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인』은 이 점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움트지 않는 삶은 움트지 않을 것이고 아슬아슬한 나이를 지나도 슬픔은 이어질 것이다. 『나인』은 주인공들이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는 비밀과 뒤틀림을 긴밀히 뒤쫓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스스로 삼킨 말들에 몇 번이고 걸려 넘어지면서도 서로를 일으키는 것만은 계속한다. 언젠가 멀어질 걸 알면서도 곁을 파고드는 마음들이 식물의 은근한 악력을 닮았다. 생장점 가득한 천선란 소설이 가닿아야 할 사람들에게 꼭 가닿기만을 바라고 있다.

- 정세랑 (소설가)
21세기에도 전쟁이 있고 그 안에 영웅이 있다면 그 영웅은 반드시 식물성일 것이다. 유나인과 그의 친구들처럼. 『나인』은 행성처럼 무거운 눈물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우리들에게, 눈물 안에서 유효한 희망을 건져 내는 길을 알려 준다. 고립이 일상이 된 시대에 읽고 나서 ‘안 외로워지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목표였다면 천선란 작가는 충분히 성공했다.
- 김지은 (문학평론가)
나인이 스스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변화를 이끄는 모습이 하도 청량해서,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속에 탄산이 맴도는 기분이었다. 『나인』 속 인물들처럼 누군가를 아낄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별난 일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끔찍한 것을 끔찍하게 여겨 다행인 사람이 되고 싶다. 천선란 작가의 글들을 내 자리에서 읽고, 진심으로 응원하겠다. 가까운 궤도에서, 언제까지나.
- 이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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