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약속(경고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약속이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자유의 이미지들을 연상시킨다. 마가는 이야기 서두에 말라기와 이사야서, 두 성경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그 약속을 언급한다. 이스라엘이 수백 년 동안 간직한 위대한 약속은 야웨께서 드디어 출애굽 이야기를 다시 한번 실현하셔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자유롭게 해 주시면, 그때는 바로 그분이 자기 백성과 함께 몸소 거하시리라는 약속이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실 것이다. 그분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실까? 원래의 출애굽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셨다.
이번에는 그와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 안에 거하면서 그들이 숨 쉬는 공기가 되고, 마음의 불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 약속을 간직하고 살았다. 요한은 그 약속이 이제 실현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과연 준비되었는가?
--- 「막 1:1-8 세례자 요한의 설교」 중에서
회개에 대한 요청은 믿음의 요청과 나란히 온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온갖 것을 믿었다. 조상과 땅과 성전과 율법을 믿었다. 하나님도 믿었다. 다만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하나님을 믿었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의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신다는 소식을 믿으라고 요청하신다. 그 일에 동참하려면 자신을 붙잡는 것을 다 끊어 버리고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믿어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렇게 했고,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미래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
--- 「막 1:14-20 제자들을 부르시다」 중에서
안식일은 이 세상의 창조와 출애굽을 돌아보는 날이자,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그분의 신실한 백성으로, 희망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날을 지킨 사람들을 구분해 주는 표시였다. 이 율법은 유대인의 성경에 각인된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날을 무시하는 듯이 행동하시는가? 안식일이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다른 표지와 더불어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은 빛의 자녀지만 나머지 세상은 어둠 속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종교와 민족주의가 강력하게 결합할 때 쉽게 나타나는 이러한 태도가 유대인 사회에 만연했고, 심지어 같은 유대인끼리도 이런 태도를 보였다. 많은 경우 그냥 충성스런 유대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유대인들보다 더 충성스런 유대인이 되어야 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축하하라는 이 명령을 지켜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현실보다도 규칙이 더 중요했다.
--- 「막 3:1-6 손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다」 중에서
마가가 8장에서 베일을 거두고 보여 준 예수님의 실체는 신이 아니라 메시아다. 물론 그보다 더 깊은 진실도 마가가 보여 주겠지만, 현재 이 이야기가 가고 있는 방향은 바로 그쪽이다. 적어도 마가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은 그분이 진정한 인간이요 이스라엘의 주님이시자 이 세상 주님이 되실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바람과 파도, 빵과 물고기를 다스리신 사건은 메시아가 온 세상에 대해 행사하실 것이라고 이스라엘이 믿었던 주권을 드러낸다. 신약성경 저자들이 예수님께 신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려 할 때, 그들은 그것이 배고픔, 목마름, 두려움, 슬픔, 죽음 등과 별개이기보다는, 그 모든 것 가운데 신비롭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인간성을 보고 있다.
--- 「막 6:45-56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다」 중에서
요한의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은 단지 그들이 입을 다물게 만들려고 던진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질문에 암호로 답하시는 것이었다. 마가의 독자들이 알다시피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을 권능으로 행동하실, 오실 그분으로 가리켰고, 세례 때 들린 음성은 왕족에 대한 시편과 예언서를 연상시키는 말로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예수님께 직접 선언했다. 이스라엘이 천 년 동안 기다려 온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대제사장들이 요한의 세례 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일은 그분이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난 일을 한참 후에 실현한 것에 불과했다.
--- 「막 11:27-33 예수의 권위가 의심받다」 중에서
이 식사가 너무도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기에, 교회는 그 의미와 이행 방식을 놓고 신랄한 논쟁을 자주 벌였고, 그 때문에 분열되기도 했다. 최후의 만찬도 슬프지만, 분열된 교회 안에서 매번 다시 이행되는 그 만찬도 슬프다. 그러나 그 만찬을 단순하게 지키건 거창하게 지키건, 그 만찬에 수반되는 말을 속삭이건 노래로 하건, 만찬 자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든 논쟁과 실패보다 더 크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식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성취한 자신의 죽음을 알고 믿으며 전용하고 살아 내기를 바라셨다.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과 기독교의 모든 하위문화는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 「막 14:12-25 마지막 만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