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억새밭의 바람 소리, 금능 밤바다에 고인 달빛, 곶자왈의 울창한 나무 사이로 스미는 햇살, 위미리의 벚꽃 향기, 바다 맛이 나는 뿔소라 한 접시…. 좋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제주를 담아내기 위해, 나는 온 감각으로 제주를 느끼며 매일매일을 제주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느리지만 정성으로 그리고 엮은 마흔여덟 가지의 제주가 한 권에 모였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고양이 부부의 안내를 받으며 제주를 여행하는 편안한 기분으로 이 책을 봐주셨으면 좋겠다.
--- p.11
산방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형제해안로를 비롯하여 사계해안, 용머리해안까지 모두 보인다. 사계리 마을과 해안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모슬포로도 불리는 사계리는 4·3사건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지역이기도 하고, 예로부터 바람이 거세고 물자가 부족해 ‘못살포’라고 불릴 만큼 척박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이 동네에는 많은 ‘핫플’이 생겨나고 있다. 봄이면 유채꽃이 장관을 이루고, 5킬로미터 이내에 송악산도 있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척박한 동네로 불리던 쓸쓸한 분위기는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p.44~45
그렇게 어딘가 조금씩 불편한 날들 끝에 맞이한 세 번째 겨울. 눈을 뚫고 봄의 새싹이 움트듯 내 안에 어느덧 감사의 마음이 피어났다. 자연에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름다운 눈의 향연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평생 겨울을 피해 다녔던 나는 제주에 와서 겨울을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울이 바쁘게 전진하기만 하는 365일에 쉼표가 되는 계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겨울이 있기에 돌아오는 따뜻한 봄이 더 감사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제주에서의 삶은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 p.67
절대적으로 좋은 직업이나 좋은 삶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플리마켓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 많은 사람이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들은 그 안에서 이미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기쁘고 다행스럽다. 제주에 살면서 이곳의 다양한 사람들, 개개인이 가진 가치, 사람 사이의 가치를 알아가는 하루하루가 참 감사하다. 제주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연이고 두 번째는 사람이다. 제주엔 재주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 p.158
마트에서 사 온 도톰한 흑돼지를 굽는다. 고기가 익는 동안 맥주를 따서 들이켜면 바다에 들어간 것처럼 목구멍이 알싸하고 온몸이 시원해진다. 친구가 알려준 어묵구이를 만들기 위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고기 옆에 어묵도 가만히 올려놓았다. 고기가 다 익으면 일단 상추에 고기 한 점을 넣고, 고추장 찍은 구운 어묵과 김치를 다 넣어 크게 쌈을 싸 먹는다. 그렇게 육류, 어류, 채소가 한데 어우러진 쌈은 세상이 모두 담긴 맛이다.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멀리서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오늘처럼 제주의 하늘이 붐볐던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꽃이 반짝인다.
--- p.188
여름이 되면 우리는 자주 바다로 향한다. 특별한 준비도 필요없다. 차에는 항상 수영복과 텐트 그리고 튜브가 대기 중이니까.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 드는 바다가 눈앞에 보이면 차를 멈추고 자리를 잡는다. 원터치식 텐트에 들어가 쉬거나 바다에 들어가 물놀이를 한다. 해변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부러울 게 없다. 행복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른다.
--- p.191~194
비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좋고 맑은 날은 맑아서 좋다. 나는 그 자연스러운 변화에 감사하고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제주가 내게 알려준 가장 큰 교훈이었다. 이제 나는 비 오는 날이 맑은 날의 반대가 아님을 안다. 매일 스쳐 가는 감정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감수성도 풍부하고 감정도 풍부한 나는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누구보다 감정적이다. 그래도 과거와 다르게 그 감정들을 담담히 바라보는 일이 조금은 가능해졌다. 나이와 세월이 내게 준 교훈은 감정이란 것은 그냥 지나간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날씨와 같아서 오늘은 어두컴컴하게 흐려도 내일은 쨍하니 맑은 날이 오곤 한다. 내일이 아니면 모레, 모레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꼭 맑은 날이 찾아온다.
--- p.200~201
겨울이 되면 제주는 더욱 바빠진다. 귤 농사철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집 마당에는 부지런한 집주인 아저씨가 심으신 귤나무, 천리향 심지어 한라봉 나무까지 있다. 하얀 눈이 소복히 쌓인 마당, 메마른 가지 사이로 귤나무가 주황빛 등불처럼 더욱 환하게 빛난다.
제주 사람들은 귤 철이 되면 이웃집에 갈 때 절대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옆집 삼춘도 지인들도 우리 집에 들를 때면 귤한 봉지씩을 꼭 가져다주신다. 이런 귤을 ‘파치’라고 부르는데, 모양이 예쁘지 않아 상품으로는 가치가 없지만 맛은 오히려 더 좋다. 제주 사람들은 이 파치와 닮은 구석이 있다. 까만 귤 봉지 하나 툭 건네고 무심히 돌아서는 모습이 이제 그들의 상냥한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투가 상냥하진 않지만 생색내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알맹이가 더 실하고 알차다.
--- p.237~238
도시에 사는 이들은 ‘그래도 제주가 부럽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푸르른 바다, 눈부신 햇살, 하얀 백사장, 시원하게 늘어선 야자수…. 바쁜 현대인들에게 제주는 아름다운 풍광뿐 아니라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쉽게 갈 수 없는 특별한 곳, 즉 파라다이스로 여겨지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누가 봐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더 불행해진 사람도, 힘든 섬 생활에 지쳐서 다시 육지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 오죽하면 제주 살이는 3년 주기로 고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을까. 제주인들끼리는 3년, 6년, 9년… 이렇게 3년을 주기로 오는 고비를 모두 견디고 10년을 넘겨야만 진짜 제주도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 섞어서 주고받곤 한다.
--- p.249
나에게 제주는 따스한 빛으로 가득한 빛의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봄꽃을 볼 수 있는 곳, 달콤한 열대 과일이 자라나는 곳. 내가 느끼는 따스함은 비단 남쪽 섬 특유의 따뜻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평범한 날에 길을 걷다가 만나는 털빛 고운 새들과 들판을 뛰어다니는 노루가 있어서 따스하고, 마을마다 주렁주렁 노랗게 열린 귤이 있어서, 계절마다 곳곳에 피어나는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있어서 따스하다. 까만 돌담 사이에 수줍게 걸린 분홍빛 노을도 따스하다. 이것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할아버지 같은 따뜻한 미소를 가진 돌하르방, 마당에서 낮잠 자는 개와 고양이도 나의 마음을 따스하게 덥힌다. 따스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사랑할 이유가 너무 많아서, 나에게 제주는 파스텔빛 그 자체다.
--- p.289
무릉도원의 시초가 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무릉도원에 비하면 참으로 소박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전란과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된 시대에,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이상향의 모습은 화려하거나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박한 무릉도원의 모습은 그저 편안하고 평범한 일상을 꿈꿨던 당시 사람들의 바람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현대에도 잡히지 않는 꿈을 좇으며 사는 이들이 많다. 눈앞에 값지고 소중한 일상이 놓여 있는데도 어딘가에 있을 무릉도원을 찾아 헤매며 산다. 그러나 무릉도원은 가장 평범하고 가장 일상적인 곳에 있다. 나에게 무릉도원은 이곳 제주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하는 지극히 평범한 나의 일상이다.
--- p.296~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