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사냥모자가 살덩어리 풍선 같은 머리통 윗부분을 쥐어짜듯 꾹 덮고 있었다. 모자에 달린 초록색 귀마개는 커다란 귀와 텁수룩한 머리카락과 귓속에 자라난 빳빳한 솜털을 덮느라 양방향을 동시에 가리키는 방향지시등처럼 양쪽으로 불룩 솟아 있었다. 북슬북슬한 검은 콧수염 밑으로는 두툼한 입술이 일자로 앙다문 채 툭 불거져 있었고, 양쪽 입아귀는 불만스러운 기색과 포테이토칩 부스러기가 덕지덕지 달린 잔주름이 되어 쑥 꺼져 있었다. 초록색 모자챙이 드리운 그늘 아래, 이그네이셔스 J. 라일리의 거들먹거리는 파랗고 노란 두 눈이 D. H. 홈스 백화점 시계 밑에서 저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군중을 내려다보며 어디 저질의 패션 취향을 드러내는 구석이 없나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히 뜯어보고 있었다. 개중에 취향과 품위에 위배될 만큼 확연히 새 옷 티가 나거나 값비싸 보이는 옷들이 몇 벌 이그네이셔스의 눈에 띄었다. 뭐든 새것이나 비싼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신학과 기하학에 대한 그 사람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며, 심지어 그 영혼이 불온하다는 의심까지 불러일으킬 만한 증거였다. --- p.15
이그네이셔스가 코끼리 같은 몸짓으로 육중한 엉덩이를 한쪽씩 들썩이며 쿵 쿵 제자리걸음을 걷자 부픗부픗한 살들이 트위드 바지와 플란넬 셔츠 밑에서 잔물결을 일으켰고, 그 잔물결은 구석구석의 단추와 솔기로 자르르 밀려간 뒤 부서졌다. 이렇게 자세를 고친 후, 그는 자기가 지금 어머니를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 곰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생각이 꽂히는 주요 지점은 조금 전부터 슬금슬금 느껴지기 시작하는 육체의 불편함이었다. 자신의 전 존재가 퉁퉁 불은 스웨이드 사막부츠 안에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는데, 그걸 확인이라도 하려는지 이그네이셔스는 기이한 두 눈을 아래로 돌려 발을 내려다보았다. 발은 정말로 퉁퉁부은 모양새였다. 그는 어머니가 자기한테 얼마나 무신경한 짓을 했는지 보라며 이 불룩한 사막부츠를 증거로 내밀 심산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커낼 거리 저 너머 미시시피 강 위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홈스 백화점 시계는 거의 다섯 시를 가리켰다. 벌써부터 그는 용의주도하게 단어를 고르고 골라 어머니에게 퍼부을 비난의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후회하게 만들거나, 그게 안 되면 혼이라도 쏙 빼놓을 작정이었다. 어머니가 분수를 깨닫도록 자주자주 쓴소리를 해줘야 했다. --- p.16
역사적 통찰이 일시적으로 흐려지자, 이그네이셔스는 노트 아래쪽 여백에 올가미 하나를 슥슥 그렸다. 그리고 리볼버 권총과 작은 상자를 그려 넣고 상자 위에 또박또박 ‘가스실’이라고 적었다. 그는 또 종이 위에 연필을 뉘인 채 가로로 왔다 갔다 칠을 하더니, 이것을 ‘묵시록적 재앙’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식으로 한 페이지를 꾸미고 나자, 이젠 이 노트를 방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다른 노트들 사이로 툭 내던졌다. 아주 생산적인 아침이로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몇 주 만에 거둔 최고의 성과였다. 침대 주변 바닥을 온통 인디언 추장의 머리장식으로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빅치프 노트 수십 권을 바라보며, 이그네이셔스는 누렇게 바랜 페이지마다, 줄 간격 넓게 그인 선마다 그 속에 비교역사학 분야의 장대한 연구업적이라는 대망의 맹아가 움트고 있다는 생각에 우쭐해졌다. 물론, 지금은 뒤죽박죽, 전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처럼 파편화된 지성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대단히 웅장한 디자인의 지그소 퍼즐을 완성하고야 말 것이다. 그때 이 완성된 조각그림은 세계의 지성인들에게 지난 사 세기에 걸쳐 인간의 역사가 그려온 대재앙의 궤적을 한눈에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 과업에 바친 지난 오 년의 세월 동안 그는 매달 평균 겨우 여섯 단락밖에 써 내려가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노트에 쓴 글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나중에 보니 몇 권은 쓸데없는 낙서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이그네이셔스는 차분히 생각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고. --- p.54
“내가 아니. 레이나는 거기 대해선 입도 뻥긋 안 해. 레이나라는 여자, 왠지 수상쩍단 말이야.” 달린이 폼 나게 코를 풀었다. “있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스트립쇼란다. 날마다 집에서 연습하고 있지. 밤에 여기서 춤출 수 있게 레이나가 허락만 해준다면 나도 고정급을 받을 테고, 그럼 수수료 받자고 물 탄 술 속여 파는 이 짓도 그만둘 수 있을 텐데. 참, 그러고 보니 어젯밤 그 사람들이 마신 술값에 대해서도 수수료 챙겨야겠다. 그 아주머니 보니까 맥주를 엄청 마셔대던데. 레이나는 도대체 뭐 때문에 불평인지 몰라. 장사는 그냥 장사지. 그 뚱보랑 그 엄마가 여기 오는 다른 손님들보다 그리 심한 것도 아니잖아. 내 생각에 레이나가 화가 난 건, 그 남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그 괴상한 초록색 모자 때문인 거 같아. 자기가 말할 때는 귀마개를 내리고, 남의 말 들을 때는 그걸 올리는 거 있지. 레이나가 들어왔을 땐 마침 다들 그 남자한테 야유를 퍼붓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남잔 양쪽 귀마개를 날개처럼 덜렁 쳐들고 있었지 뭐야. 사실 그 꼴이 웃기긴 했어.” --- p.61
어쨌거나 리바이 팬츠 사의 평가기준은 아주 낮았다. 몸이 날래기만 해도 충분히 승진할 자격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곤잘레스 씨는 사무실 책임자가 되었고 의욕 없는 직원 몇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직원들과 타이피스트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하루가 멀다고 들락날락 사람이 바뀌는 듯싶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일한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미스 트릭시였다. 그녀는 여든이 넘은 경리 보조로,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리바이 팬츠의 회계원장에다 틀렸거나 말았거나 숫자 베껴 쓰는 일을 해오고 있었다. 게다가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나 늘 초록색 셀룰로이드 챙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녀의 이러한 태도를 곤잘레스 씨는 리바이 팬츠에 대한 충성심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때론 일요일에도 이 챙모자를 일반 모자로 착각하고서 교회에 갈 때 쓰고 갔다. 심지어는 오라버니의 장례식에까지 쓰고 갔다가, 그녀보다 좀 더 똘똘하고 손아래인 올케가 홱 벗겨버린 일도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미스 트릭시를 해고해선 안 된다고, 리바이 부인이 엄명을 내려둔 터였다. --- p.103
이 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자궁만큼이나 육감적으로 안락했다. 의자들은 어떤 압력에도 비굴하게 굴복하는 스펀지와 잔털 덕분에 살짝만 건드려도 몇 인치씩 폭폭 들어갔다. 아크릴 나일론 카펫의 융털은 그 위를 친절하게도 걸어주는 사람들의 발목을 기분 좋게 간질여주었다. 바 옆에는 꼭 라디오 다이얼같이 생긴 것이 있었는데, 이걸 돌리면 실내 전체의 조명을 부드럽게 혹은 밝게, 분위기에 따라 마음대로 조절 가능했다. 인체에 맞게 디자인된 의자들과 마사지 테이블 하나, 부드러우면서도 도발적인 움직임으로 신체 곳곳을 자극해주는 운동기구 하나가 집 안 전역에 걸쳐 서로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리바이 별장, 이것이 해안도로 표지판에 쓰여 있는 이름인데, 이곳은 그야말로 감각의 천국이었다. 단열재로 마감한 벽 내부에는 세상 그 어떤 욕망도 충족시킬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 p.144
“동지들이여!” 이그네이셔스가 장엄하게 말하며 시트를 잡지 않은 한쪽 팔을 치켜들었다. “드디어 우리의 날이 왔습니다. 여러분 모두 잊지 않고 전쟁 무기들을 가져오셨겠지요.” 재단 테이블 주위에 둘러선 무리로부터는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막대기나 사슬, 몽둥이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제야 노동자들은 일제히 키득거리며 울타리 말뚝이며 빗자루며 자전거 체인, 벽돌 따위를 흔들어 보였다. “세상에! 여러분은 정말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이것저것 잡다하게 모아들 오셨군요. 우리의 공격이 발휘할 폭력성이 예상치를 훨씬 능가할지도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우리의 타격 하나하나가 결정적일수록 결과 또한 결정적이 된다는 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무기를 대충 살펴보니, 오늘 우리가 벌일 성전(聖戰)이 최후의 성공을 거두리라는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우리가 지나간 길에는 파괴와 약탈이 휩쓸고 간 리바이 팬츠만이 남을 것입니다. 불에는 불로 맞서야만 합니다.” --- p.205
파라다이스 핫도그 상회는 포이드러스 거리에 위치한, 이 기업이 아니었다면 완전히 텅 비었을 어느 상가 건물의 어두컴컴한 일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예전에 자동차 정비소였던 곳이었다. 차고의 문은 보통 열려 있어, 끓는 핫도그와 머스터드 냄새뿐 아니라 수년에 걸쳐 숱한 하먼과 헙모빌 자동차에서 뚝뚝 흘러내린 윤활유와 엔진오일에 흠뻑 절어버린 시멘트 냄새까지 가세해 시큼한 악취가 지나가는 행인들의 콧구멍을 시큰거리게 했다. 행인들 중에는 이따금 파라다이스 핫도그 상회의 강력한 악취에 압도당해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열린 문 너머 차고의 어둠 속을 흘긋 들여다보는 이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전거 타이어 위에 거대한 양철 핫도그가 올려진 모양의 수레들이 죽 늘어선 광경과 마주쳤다. 고상한 차량 컬렉션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광경이었다. 이 양철 핫도그 수레들 가운데 몇몇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여기저기 찌부러진 프랑크푸르트 소시지 하나는 아예 옆으로 쓰러져 하나밖에 없는 바퀴가 그 위로 나자빠져 있는 게, 영락없이 교통사고로 치명타를 입은 꼴이었다. --- p.227
이그네이셔스는 하마터면 무작정 덧문으로 뛰어들 뻔했다. 널빤지와 걸쇠를 박살내고 나가, 저 삼실같이 땋아 늘인 머리채로 저 불여우의 모가지를 꽁꽁 묶어 얼굴이 시퍼렇게 될 때까지 조르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성이 이겼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머나가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건 바로 탈주로였다. 드디어 포르투나의 분노가 누그러졌도다. 운명의 여신은 그를 정신병자처럼 구속복을 입혀 목을 조르거나, 형광등이 밝혀진 시멘트 감방에 처넣고 봉해버리는 식으로 이 악순환을 끝낼 만큼 타락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신은 그에게 보상을 해주려는 것이리라. 어찌됐든 포르투나는 요 불여우 머나를 어느 지하철에서, 어느 피켓 시위대에서, 어느 유라시아 실존주의자의 악취 나는 침대에서, 어느 검둥이 간질병자 불교 신자의 손아귀에서, 어느 집단심리치료 모임의 말 많은 현장 한가운데서 용케도 소환하여 여기에다 왈칵 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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