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만큼 진보적인 정치인을 찾아보기란 지금도 쉽지 않다. 1970년 10월 16일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가진 첫 기자회견을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진보적이다. 김대중은 “집권하면 극소수의 특권층만이 비대해지는 경제 및 사회 구조를 개혁, 전체 대중이 잘살 수 있도록 자유경제의 원리를 준수하는 동시에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만이 성공하는 시민사회를 육성하겠다”면서 5개 분야의 정책 공약을 제시했다.
그때 내걸었던 공약은 미·중·소·일 4대국의 한반도 전쟁 억제 보장(4대국 안전보장론), 남북한 화해와 교류 및 평화통일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과 교역 추진, 향토예비군 폐지, 대중경제노선 추진, 초중등학교 육성회비 폐지, 사치세 신설, 학벌주의 타파, 이중곡가제 폐지 등이다.
---「김대중은 왜 진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중에서
2019년 10월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미국 하원의장은 트럼프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면서 링컨을 인용했다. 하원의 탄핵 청문회를 열기 전, 펠로시는 의사당에 걸린 링컨 초상화를 보면서 “국민의 마음이 전부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때 트럼프는 보수 여론의 강력한 지지 속에 살아났지만, 2020년 11월 대선에선 민심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트럼프가 패배한 직후인 2021년 1월 6일, 그의 지지자들이 조 바이든(Joe Biden)의 선거 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워싱턴 의사당에 난입한 사건은 상징적이다. ‘다수 국민의 선택’에 기반한 현대 민주주의는 ‘기존의 법과 질서’를 상위에 두려는 위협뿐만 아니라, 선거에 승복하지 않는 강경파의 조직적 저항에 직면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게 미국만의 일이 아니라는 게 위기의 본질이다.
---「‘선출된 권력’을 어디까지 비판할 수 있는가?」중에서
이 무렵 노회찬은 ‘진보의 세속화’를 주장했다. 진보정당이 위기가 아닌 적은 2004년을 빼고 거의 없었지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뒤엔 진보정당 입지가 훨씬 좁아졌다. 노회찬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는 겁 많은 제1야당(민주당)도 자주 참칭하는 좋은 말이 되었고……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를 입에 올리고 박근혜 후보가 만 5세 무상교육을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진보와 반진보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가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회찬은 이걸 돌파하는 무기로 ‘진보의 세속화’를 주장했다.
---「노회찬의 ‘진보의 세속화’」중에서
고도성장 시대와 달리, 지금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를 따기가 어렵다. 좋은 일자리에 대한 젊은 세대의 강렬한 요청은 그런 상징적 표현이다. 이들의 고민에 공감하지 못하고선 한 걸음도 문제 해결을 진전시킬 수가 없다. 먼저 공감하고, 그 토대 위에서 세대 갈등의 담론이 아니라 일자리와 주택 등 개별 사안을 해결해나가는 데 정책적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정치란 바로 그런 것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가 정작 젊은 세대의 거센 비판을 받는 건 이 점에서 부족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을 잡지 못한 건 단적인 예다. 그 책임이 어디 문재인 정부만의 것일까? 진보정당과 언론을 비롯한 모두가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평등이 사라진 공정과 정의」중에서
C&M 정규직 노조는 설립 이듬해인 2011년부터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 ‘비정규직 지부’를 만드는 일에 나섰다. 그때 정규직·비정규직이 만든 노조준비모임의 이름이 ‘함께 살자’였다. 그렇게 2년여간 조직 작업을 한 끝에 2013년 2월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지부’를 결성했다. 2014년 비정규직 조합원 109명이 계약 해지를 당하자, 정규직은 연대 투쟁에 나섰다. 비정규직 조합원 2명이 서울 프레스센터 앞 전광판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간 뒤 정규직은 전면 파업으로 이들을 지원했다. 결국 이 싸움은 희망연대노조의 승리로 끝났다.
지금 다시 이동훈 위원장에게 “정규직 조합원들이 어떻게 비정규직과 함께 싸울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이동훈 위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사실 다른 사업장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었어요. 협력업체 직원들은 예전에 한솥밥을 먹다가 외주화가 진행되면서 회사를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러니 외면하기 어렵고, 그분들이 처한 상황이 우리의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규직을 뛰어넘은 ‘약자와의 연대’」중에서
유권자 절반이 몰려 있는 수도권의 지역화는 야당인 국민의힘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예전엔 진보 성향이 강한 서울에선 고전하더라도 경기·인천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자신감은 더는 가질 수가 없다. 민주당도 부담은 있다. 2012년 이후 전국 선거에서 민주당이 선전한 건, 수도권에서 상당한 격차로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을 따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도권이 흔들리면, 민주당도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여든 야든 수도권을 이기지 못하면 전국 선거에서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대통령 선거는 수도권에서 5%포인트 격차만 나도, 득표수로는 100만 표 이상의 차이가 난다. 아무리 영남 또는 호남·충청을 석권해도 이 격차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경기도 지사 출신을 첫 집권당 대선후보로 밀어올린 ‘수도권의 지역화’가 이재명 후보를 청와대에 입성시키는 데까지 나갈 수 있을까?
---「2022년 대선, 수도권이 승부처다」중에서
안철수 대표가 갈수록 보수 본류로 다가서는 건 그런 점에서 필연적이다. 그는 2021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와 단일화를 했고, 2022년 3월 대선에 또다시 출마했지만 완주 여부는 불확실하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의 단일화 가능성은 대선 막판까지 열려 있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정치적 견해가 다른 유권자를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정치에서 승리하려면 분명한 정치적 지향을 내보여서 진보 또는 보수 지지층의 지지를 확고하게 받는 게 중요하다. 두 발은 분명하게 진보를 딛고 서되 타협과 포용의 유연한 자세를 보이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를 오가며 세 번째 대선 출사표를 던진 안철수 대표의 행로는 ‘중도 실험’의 무망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듯싶다.
---「안철수의 중도는 왜 보수로 기울어지는가?」중에서
스페인에서 1990년대에 본격화하기 시작한 세대 갈등이 정치 현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건 2008년 금융위기 이후다. 세계적 금융위기로 경제난이 심해지고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특히 젊은 층의 실업률이 40%에 달한 게 불을 붙였다. 이 거대한 불만의 흐름을 정치 행동으로 담아낸 건 2014년 출현한 새로운 정당 포데모스(Podemos)였다. 좌파 성향이지만 정당 이름에 ‘사회(social)’ 또는 ‘민주(democracy)’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게 눈에 띈다. 더는 진보라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 진보와 길을 달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스페인은 ‘세대 갈등’을 어떻게 넘어섰는가?」중에서
반대로 진보 세력은 ‘윤석열 검찰’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사퇴시키려 그의 가족 전체를 만신창이로 만든 사실에 분노했다. “가족을 도륙당했다”고 조국 전 장관이 말할 정도로 검찰의 ‘조국 수사’는 한참 도를 넘었다. 오죽하면 홍준표 후보가 “검찰이 보통 가족 수사를 할 때는 가족 중 대표자만 수사를 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과잉 수사를 했다. 집요하게 조국 동생을 구속하고 5촌 조카 구속에 딸 문제도 건드렸다”고 말했을까 싶다.
조국 전 장관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수와 진보 간에 벌어지는 격렬한 증오의 싸움, 그 싸움의 칼날 위에 맨발로 서버린 셈이 되었다. 그 대가로, 윤석열 전 검찰총장 역시 장모와 아내를 둘러싼 논란까지 집요하게 파헤쳐지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증오의 정치를 뛰어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