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와 같은 세대는 ‘문명사적 행운아’이다. 1951년에 태어나 마이카 시대와 스마트폰 시대를 거치는 동안 1차에서 3차 산업사회까지 모두 경험했고, 운이 좋아 몇십 년 더 살게 되면,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과 메타버스가 구현될 스마트 안경을 쓰고 자율주행차를 타게 될 터이니 4차 산업사회까지 온전히 경험하게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허호익 “4차 산업혁명과 메타버스의 문명사적 이해”」중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에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의한 과정신학은 전지전능한 신개념에 회의적이었으며 이에 ‘고난받는 신’으로 대처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의 신관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본다. 메타버스와 함께 인간들은 그동안 펜을 손에 쥐고 펜을 찾은 오류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신이 인간 자신 그 자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이며 유발 하라리는 이를 ‘호모 데우스’라고 했다. 동학의 ‘인내천’ 같은 신관이 될 것이다. 이는 신을 찾는 방법의 어리석음과 오류를 말하는 것이지 신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호모데우스’를 넘어 ‘호모호모’가 될 것이며 이는 성육신된 ‘예수’를 두고 하는 다른 말이다. 이렇게 메타버스와 함께 예수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김상일 “메타버스 시대의 메타 신학”」중에서
거칠게 생각하는 단상으로 바야흐로 ‘와이파이적 성령의 시대’를 사는 신학도, 목회자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와이파이 성령파’가 되어야 하거나 혹은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성부에의 신앙’과 ‘성자의 기억’을 어김없이 공유했으면 좋겠다. 따라서 신학은 정녕 ‘메타버스’ 세대를 맞아 조금 더 전향적인 토론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대면 예배, 대면 목회, 대면 상담만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거기에 거듭 말하지만 ‘성부에의 신앙’과 ‘성자의 기억’만 함께 공유한다면 새로운 시대의 신학도, 교회도 바탕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서정민 “메타버스(metaverse) 시대의 소통 문제와 신학적 소회(素懷)”」중에서
발칙한 상상의 세상에서-별로 멀지 않은 미래에서- 우리 신학자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그 미래를 내다보며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교회는 어떻게 변모해야 할까? 혹은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사 속에서 그러했듯이 아마도 두 가지 큰 흐름이 등장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기독교는 메타버스와 같은 그러한 세속의 물결을 거슬러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메타버스라는 트렌드에 발맞추어 지혜롭게 변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메타버스라는 트렌드를 거부하고 싶은 신학적 입장이 있는가 하면, 메타버스에서 정체성을 찾는 미래 세대를 위한 목회적 고려도 있을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이 중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받드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박숭인 “메타버스 시대와 신학의 과제”」중에서
적응은 빠를수록 좋다. 신학이나 목회 환경이 메타버스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적응 능력이 빨라야 적자생존의 현실 세계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떠난 가상은 여전히 가상일 뿐이다. 아무리 가상이 우리의 현실에 영향을 준다고 해도 현실의 뿌리를 떠나면 줄기와 가지 그리고 꽃과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상현실을 무시해서는 또 현실에서 도태되기 쉽다. 가상현실,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명권 “메타버스 시대의 신학”」중에서
메타버스는 제4차 산업혁명이 추구하는 상징 세계이다. 연세신학의 특징은 다양한 사회 속에서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생각 틀과 패러다임을 제공해 왔다. 팬데믹 가운데서 시대를 앞당기는 방안을 제안하는 일은 매우 시기적절하다. 1. 본질로 회복하는 목회 지향 2. 거룩성의 회복 3. 높은 자기 정체성(high self identity)의 회복
---「윤사무엘 “메타버스 시대의 목회”」중에서
말씀에 선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나가도 ‘돌아올 자리’를 늘 생각하고 있다. 그 자리는 ‘현실’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지어내신. 돌아와야 할 현실을 품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메타버스로 아웃(OUT) 했어도 그는 곧 따뜻한 우리의 집(the sweet home)으로 인(IN)할 것이다. 드나들기가 수월하다면 메타버스도 제법 쓸 만한 물건이 될 수 있다. 드나들기(IN & OUT). 그중에 돌아오기가 문제다. 탕자처럼 연어처럼 상처를 입고라도 돌아오기.
---「조은석 “메타버스 시대의 교회, 예배 그리고 목회: 르네상스에서 인간지리학을 거쳐 신실존주의까지”」중에서
기술을 개발하는 학자들과 기술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이미 기술의 생태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기제들을 만들고, 이를 통해 기술 개발이 야기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미리 예상한 후, 이를 방지하는 방향으로 기술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연구를 보면서 그리고 ‘메타버스 목회’를 주장하는 교계의 일부를 보면서, 교회는 그리고 신학은 어찌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당장의 답은 없다. 답이 없으니 답을 찾을 때까지는 멈추어야 한다.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다. 종교는 늘 그래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적어도 새로운 기술을 도입함에 앞서 치열한 고민과 연구의 흔적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한다. 신을 중개함에 있어 부족함은 있을지언정 부끄러움은 없어야 할 테니 말이다.
---「이민형 “메타버스 시대의 신학과 목회를 묻기 전에”」중에서
제2의 종교개혁은 칭의를 강조한 나머지 성화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복음’으로 세상과 죽음과 사탄을 능히 이기는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로의 왕의 교체를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진정한 뜻을 바로 깨달아 변화된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실추한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아멘.
---「박호용 “코로나19, 메타버스와 한국교회의 신학적 반성”」중에서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그리스도인은 최초의 메타버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꾸는 자들이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멈춰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소망의 희미한 빛줄기마저 사라진 것 같은 절망의 일상 가운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은 위로와 희망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신음하는 피조물의 세계를 불쌍히 여기시어 치료하여 낫게 하실 것이고, 주민을 고쳐주고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실 것이다. 사람도 짐승도 자취를 감춘 쓸쓸한 곳에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렘 33:11)가 들리게 하실 것이다. 한 의로운 가지가 돋아나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간이다.
---「김치범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중에서
메타버스 시대에 신학과 윤리가 직면한 도전은 크고, 그 도전에 대응해서 신학과 윤리가 할 일은 많다. 신학은 메타버스에 등장하는 행위 주체들의 복수성과 다양성을 인지하고, 행위 주체성의 이론을 가다듬어야 하고, 메타버스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해야 하고, 하나님의 정의의 요구에 따라 메타버스의 윤리를 확립하여야 한다.
---「강원돈 “메타버스 시대의 신학과 윤리”」중에서
이런 점에서 21세기 기독교 신학은 현재 초기 단계인 메타버스의 발전 양상을 가시적인 과학의 발전 양상으로만 보지 말고, 그 발전 양상의 흐름 저변에 흐르고 있는 사변적인 발전 양상도 함께 살펴봄으로써 근대로부터 과학을 통해 인류가 추구해 오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현대에 이르러 물리적 차원을 넘어 가상의 차원에서 어떻게 형성되어가고 있는지를 예의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예의 주시하면서 메타버스 시대에 기독교 신학이 필히 되뇌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라는 사실이며,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은 우주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현실 세계를 떠나 가상세계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김동환 “메타버스 시대에 신학의 미래”」중에서
교회가 어느 한 가지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때는 분명 소중한 무엇이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변화가 가져온 상실은 아쉬움을 남기고, 때로는 기독교의 핵심을 잃어버렸다고 여길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사라진 것뿐이다. 교회는 수도 없는 변화 가운데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기독교는 과거의 기독교와 늘 다르다. 그리고 내일의 기독교도 오늘의 기독교와는 항상 다를 것이다. 내일 당장 새로운 교회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한 발자국 뒤에서 본다면 그 변화는 마치 양피지에 적힌 글 조각을 모아 읽던 기독교인들이 인터넷으로 성경을 보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만큼의 급진적 변화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변화에 집중하지만, 실제로 이 변화는 통시적으로 볼 때 ‘변화’이고, 공시적으로 볼 때는 ‘다양성’으로 드러난다. 모든 교회의 변화가 모두가 공유하는 상태에서 한 가지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와 과거의 기독교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의 기독교도 ‘너’의 기독교와 다르다. 지금의 ‘나’와 ‘너’ 사이에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들이 물론 있지만, 그것이 꼭 과거의 누군가의 기독교와도 모두 공유되는 것도 아니다.
---「이정철 “세례 요한이 청계천에 나타난다면: 21세기 디지털 시대와 기독교”」중에서
디지털 신학의 목표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종착지인 “메타버스의 시대의 신학과 목회”를 위한 우리의 관심과 공명하고 있다. 물론 그 전에 우리가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하고, 그 연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함을 제안하였다.
만약 호감이나 반감이 든다면 혹은 그에 관해 무감하다면 나는 왜 그러한가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편견과 오해는 바꾸어 나가고 맹목적인 기대나 추종은 지양해 가면서 새롭게 등장한 ‘메타버스 시대’에도 하나님에 대해 ‘묻고, 배우고, 소통하는’ 우리들의 소중한 과업을 다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지속해 나갔으면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학과 목회가 메타버스 시대에도 ‘소금과 빛’(마5:13-16)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종우 “메타버스 시대의 신학과 목회 ― 함께 성찰하며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기를”」중에서
나는’ 메타버스 시대에 신학과 목회’ 같은 기획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메타버스’의 버스가 Bus가 아니라 Universe의 verse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의 사고는 Bus에 머물러 있다. 어떤 신세계로 우리를 데려다줄 운송 도구로서의 버스 말이다. 그 지점에서 교회가 어떻게 생존할지에 대한 도구적 고민만 있지, 내용에 대한 성찰적 고민은 없어 보인다. 신학과 목회는 방편(도구)이 아니라 내용인데, 내용의 핵심인 Verse(Text)에 대한 깊은 성찰을 현실의 논의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신세계는 버스(Bus)의 종점으로서의 지점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텍스트(verse)가 만드는 세계가 메타버스의 진정한 결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술의 진보가 역사의 진보를 역행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붕괴된 그곳에서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고, 전쟁이 끝나고, 생태계가 온전히 보전되고, 각계각층 소수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는 그런 신세계 말이다. 새로운 텍스트가 쓰여지는 곳 그리고 실천되는 곳(Context)이 메타버스의 종점이다.
---「김기대 “기술적 진보가 신학적 진보로 이어지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