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 좋음인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하는 것, 보는 것, 어떤 즐거움과 명예처럼 다른 것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도 추구되는 것인가? 사람들이 다른 것을 위해 이것을 추구하더라도, 얼마든지 이것들도 그 자체로 좋음에 속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자체로 좋음인 것은 좋음의 원형뿐이고, 다른 것은 아예 없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원형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반면, 우리가 앞서 말한 것도 그 자체로 좋음이라면, 좋음에 대한 정의는 모든 데서 같아야 한다. 이는 흰 눈에서나 흰 납에서나 희다는 정의가 같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명예와 지혜와 즐거움이 왜 좋음인지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고 구별된다. 따라서 하나의 원형에 대응하는 공통적인 좋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다른 무엇을 위해 추구하는 것보다 더 최종적이라고 말한다. 어떤 다른 것을 위해 바라지 않고 그 자체로 바라는 것이, 다른 어떤 것을 위해 바라는 것보다 더 최종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다른 것을 위해 바라지 않고 언제나 그 자체로 바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최종적이라고 부른다.
다른 무엇보다도 행복이 그러한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것이다. 행복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선택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예나 즐거움이나 지성이나 온갖 미덕은 우리가 그 자체로 선택하기도 하지만(그것을 통해 다른 어떤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그것들을 선택할 것이므로), 행복을 위해서, 즉 그것을 통해 행복해지리라 여겨 그것들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위해 행복을 선택하거나, 일반적으로 행복 외의 다른 어떤 것을 위해 행복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1권 인간에게 “좋음”이란 무엇인가」중에서
즐거움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왔다. 그렇게 우리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에,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제거하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사람마다 정도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즐거움과 고통을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전체 논의에서는 반드시 이것을 다루어야 한다. 즐거움이나 고통을 올바르게 느끼는지, 아니면 그릇되게 느끼는지가 우리 행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처럼, 분노와 싸우는 것보다 즐거움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들다. 하지만 기술이든 미덕이든 언제나 더 힘든 것과 관련이 있다. 더 힘든 것을 이루어내야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미덕과 정치학은 즐거움과 고통을 깊이 다룬다. 즐거움과 고통을 제대로 잘 사용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제2권 도덕적 미덕이란 무엇인가」중에서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것을, 정의롭게 행하게 하고 정의로운 것을 바라게 하는 그런 성품을 정의라고 함을 우리는 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불의한 것을, 불의하게 행하게 하고 불의한 것을 바라게 하는 그런 성품을 불의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도 이것을 논의의 기초로 삼자.
성품은 지식이나 능력과는 다르다. 능력과 지식은 같은 것이 반대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품은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 관련되지는 않아 보인다. 예컨대, 건강한 사람은 건강과 반대되는 것을 행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건강하게 하는 것을 행한다. 건강한 사람이 걷는 것처럼 걸을 때, 사람들은 그가 건강하게 걷고 있다고 말한다.
---「제5권 정의」중에서
어떤 행위의 목적은 그 행위의 출발점이 되지만, 즐거움이나 고통으로 파괴된 사람에게는 그 출발점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이 목적을 위해 그리고 이 목적에 따라 자기가 모든 것을 선택하고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악덕은 그 출발점을 파괴한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인간에게 좋음과 관련해 이성을 수반한 참된 실천적 성품일 수밖에 없다.
기술은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사용할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는 그렇지 않다. 즉, 기술에서는 어떤 나쁜 목적을 달성하려고 의도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선택할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는 다른 미덕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선택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기술이 아니고 일종의 미덕이다.
이성을 지닌 혼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과 관련된 부분과는 다른 부분, 즉 의견을 만들어내는 부분에 따른 미덕이다. 의견과 실천적 지혜는 둘 다 변하는 것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천적 지혜는 단지 이성을 수반한 성품은 아니다. 성품은 망각될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는 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다.
---「제6권 지적 미덕」중에서
어떤 즐거운 것이 항상 즐거울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여서 우리 본성 속에는 한 가지만 있지 않고 다른 것도 있어, 둘 중 한쪽이 활동하면, 다른 쪽에게는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는, 우리 본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게 된다. 만일 우리 본성이 단일하다면, 같은 활동이 언제나 가장 즐거워진다.
그러므로 신은 항상 하나의 단일한 즐거움을 누린다. 운동만 활동인 게 아니라 운동하지 않는 것도 활동이고, 즐거움은 운동하는 것보다 운동하지 않는 것 속에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모든 변화는 달콤한 것”이라고 했지만, 변화가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일종의 악 때문이다. 변덕스러운 사람이 나쁜 사람이듯, 변화가 필요한 본성도 나쁜 본성이다. 그런 본성은 단일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제7권 즐거움의 본질: 자제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중에서
서로가 처음에 얻으려고 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얻을 때마다 다툼이 일어난다. 자기가 바랐던 것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키타라 연주자에게 더 훌륭한 연주를 해줄수록 더 많은 보수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튿날 키타라 연주자가 약속된 보수를 달라고 요구하자, 그 사람은 즐거움에 대해 즐거움으로 갚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된 것으로 대답했다.
만일 양쪽이 함께 바란 것이 즐거움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쪽은 즐거움을 원했고 다른 쪽은 금전적인 이득을 원했으므로, 한쪽은 자신이 원했던 것을 얻었지만 다른 쪽은 얻지 못했으므로, 두 사람이 공동으로 얽힌 일은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각자는 필요한 것을 얻고 싶어 자기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가치를 정하는가?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가치 정하는 일을 맡기는 듯하다. 사람들은 프로타고라스도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것을 가르칠 때마다 배우는 사람에게 그것을 배워 뭘 할 수 있을지 예상하고 값을 매겨보라고 한 후에, 그렇게 제시된 값을 수업료로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이런 문제에서 “보수는 먼저 정하는 법”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제9권 사랑 (2)」중에서
하지만 대중을 고귀하고 선한 것으로 나아가게 할 수는 없다. 대중은 수치심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낄 때 복종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도 수치심이 아니라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그러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감정을 따라 살면서 각자가 원하는 즐거움과 그런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을 추구하고, 그와 반대되는 고통은 피한다. 또한, 대중은 고귀하고 진정으로 즐거운 것을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그게 무엇인지조차 전혀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자들을 말로만 바꿀 수 있겠는가? 성품 속에 오랫동안 깊이 박힌 것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을 훌륭하게 해주는 것이 그 안에 갖추어져 있다면 그것을 미덕으로 바꾸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제10권 즐거움과 행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