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 저는 그 ‘인류세’라 는 말보다 ‘자본세’라고 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견해에 공감하죠. 인류세라고 하면, 인류가 탄생한 지 수십만 년 지났는데, 기후위기가 그 긴 세월 전체에 걸쳐 축적된 문제가 아니잖아요. 결국 인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가 약 5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주도해 온 성장주의가 야기한 문제잖아요. 자본주의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걸 곧바로 드러나지 않게, 슬쩍 호도하려는 의도가 ‘인류세’라는 말에 담겨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자본세’라는 말이 훨씬 더 온당한 규정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죠. 기후위기라는 것은, 팬데믹도 마찬가지고요, 자연의 역습이랄까,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저는 하죠. ‘지구가 네 개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정도니까. ‘자연의 역습’, 거기에 인간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고요. 그런 얘기 많이 해왔잖아요. “인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다.”
--- p.21
희일: 이 위기를 넘어서려면 1920년대, 1930년대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보다 더 강력한 국제 기후운동, 예컨대 ‘기후 인터내셔널’ 형태의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엔 당사자 총회처럼 각 정부 수장들이 모여서 하는 형식적인 국제 담화로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한다는 건 거의 농담에 가깝죠. 계속 자본의 이윤 창출에 목을 매고, 축적 과정을 지연시키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결정하지 않는 무능력한 조직으로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어요. 국제적 차원에서도 강력한 기후운동도 존재하고, 또 일국적 차원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요청하는 기후운동이 있어야 하는데 참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 p.37~38
세화: 난민이 어떤 존재일까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난민은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을 잃은 존재예요.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이웃도 없는, 대부분이 혈혈단신으로 물설고 낯선 땅에 와서 사회적 입양을 허락해 주세요, 하고 간청하는 사람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말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직업도 없어요. 빈손으로 아무 일이나 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환대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혐오와 배척을 부추기나요? 청와대 청원에 7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었는데 대형 교회 중심의 개신교 일파가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고는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참으로 참담한 한국 사회의 몰골이죠.
--- p.100
희일: 몇 년 전에도 육군은 함정 수사를 했어요. 게이 앱에 게이인 척하고 잠복해서 군인들을 색출한 거예요. 무슨 파시스트 비밀경찰들도 아니고, 가짜 게이 흉내를 내서 색출을 하고 장교들까지 전역시키고 그랬거든요. 한국 육군 수준이라는 게 이렇게 잔혹합니다. 변한 게 없어요. 1997년, 제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시작했을 때예요. 그때 한 트랜스젠더가 하이힐을 신고 훈련소에 들어갔어요. 자신은 여성인데 왜 군대를 들어가야 되느냐는 항의의 표시였어요.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결국 그 트랜스젠더는 훈련소 화장실에 들어가 병을 깨서 자기 고환을 잘라버렸어요. 정말 고통스러운 시대였죠. 그런데 지금 그때보다 더 나아진 게 있을까요? 동성애를 금지하는 ‘군형법 92조 6항’은 여전히 존재하고, 게이 군인들을 색출하고, 트랜스젠더 혐오에 혈안이 된 것만 봐서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육군이 성소수자들을 대하는 일련의 태도야말로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를 가장 하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사실 대통령이 됐든, 민주당이 됐든, 민주주의 세력 어쩌고 입에 발린 헛소리들을 할 시간이 있으면 이런 차별적 문제들 먼저 시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니, 그 전에 트랜스젠더 두 명이나 연달아 자살을 했으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유감이라도 표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말 지독한 사람들이에요. 자살을 하는 성소수자에, 비닐 움막에서 자다 얼어 죽는 이주노동자에, 보호소에서 새우꺾기를 당하는 난민까지,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차별 그 자체예요.
--- p.113
세화: 20세기 초에 유태인이 아주 막역한 게르만 친구한테 쓴 편지가 있어요, 내용 중에 이런 게 나옵니다. “나는 자고 일어날 때마다 ‘아, 나는 유태인이야.’ 하고 나를 돌아본다.” 하고는 친구에게 물어봐요, “너는 자고 일어나서 ‘아, 나는 게르만이야.’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니?”라고요. 유태인이 쓴 편지를 읽으면서 게르만 친구는 잠시 생각해 보니 자고 일어났을 때 단 한 번도 ‘아, 나는 게르만이야.’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저도 아, 나는 서울 사람이야, 한국 남자야,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가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면서 ‘난민이고, 이주노동자’임을 매일 확인하게 된 거죠. 사회적 소수자가 되니까 자기를 돌아보게 됐던 거예요. 그러니까 다수자는 자기를 돌아볼 이유가 없는데, 소수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거죠. 문화·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소수자들에 의해 훌륭한 작품들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역으로 다수자에 속하는 사람들이나 강자들은 그러한 점이 디폴트로 당연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생각 자체가 거의 없어요. 여성의 경우에는 밤길을 걸어갈 때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두려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걸 남자들은 느끼지 않는 그런 점들에 대해 학습이 필요한 거죠. 사회적 강자나 다수자는 역지사지와 함께 의지로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볼 때 비로소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와의 관계 설정에 올바른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소수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는 점에서 천형天刑을 받은 존재인 동시에 천혜天惠를 받은 존재라는 말을 쓴 적이 있어요. 하늘로부터의 형을 받기도 했지만 혜택을 받기도 했다는… 강자나 다수자도 자기를 돌아보아야 한다,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 성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 p.121~123
희일: 자신의 존재를 디폴트로 설정하는 이성애자들은 생물학적 이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상성’에 정박된 사회가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잘 하지 않아요. 물론 성소수자들은 어렸을 적부터 성애를 비롯해 자신의 존재와 감각을 다양한 각도에서 성찰할 수밖에 없죠. 동성애 해방운동, 즉 퀴어 운동은 이렇게 당연시되는 정상성을 의문시합니다. 성 정체성과 사회구조를 말이죠. 기준 자체를 재구성하자는 급진적 요청이에요. 나도 나의 존재를 성찰하고, 당신도 당신 존재를 성찰하자, 그런 거죠.
반면에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성소수자로서의 실존적 인권에 방점을 찍어요. 미국식 성소수자 운동이 그렇습니다. 현재는 뭐 다 글로벌화됐지만요. 실존 양태에 기반을 둔 인권을 중요시하다 보니, 정체성 정치에 상당 부분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 현재까지도 종종 ‘피해자 정체성’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제일 피해자야.” 저도 가급적이면 이런 우울한 레토릭은 피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사용할 때가 있더라고요.
퀴어 운동, 그러니까 이성애·동성애 같은 성애의 서사도 뒤흔들고 사회구조도 재구성하자는 급진 성정치학의 역사를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게 소수자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디폴트라고 생각하는 다수에게도 더 많은 사유의 기회와 삶의 가치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피해자 관점이 아니라 해방의 관점으로.
--- p.123
세화: 저는 지금으로서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반대하느냐가 진보인지 아닌지를 가름하는 기준이라고 보고 싶은데요. 우리 사회는 수구적 보수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힘당(국민의힘)과 거기에 맞서 자유주의 보수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오랫동안 대립해 왔죠.
그러나 두 당 모두 보수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데요, 두 당은 한국의 양대 정당으로 앞으로도 권력을 교차로 계속 주고받을 위험이 커요. 겉으로는 서로 싸우지만 실제로는 나눠 먹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진보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고, 지금은 무척 취약하지만 앞으로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그런 의미로 일단 얘기를 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한국에서는 진보의식을 형성하는 사람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데, 진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 가를 볼 때, 이 점이 이를테면 유럽과 전혀 다른 점인데요. 대부분이 ‘자신의 계급적 처지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어쨌든 계급화, 계층화가 이루어지면서 부모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고 노동자는 노동자로 살리라는 전망, 이런 계급의식이 일정 정도 형성되어 있어요. 한국의 경우에는 그게 거의 없죠. 분단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진보세력 형성에 무척 어려운 문제를 낳게 됩니다.
--- p.172~173
희일: ‘세계의 시민’이 된다는 건 멋진 일인 것 같아요. 주체의 재구성이잖아요. 우리가 온갖 사람들과 사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평등, 연대, 책임의 문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좀 더 확장된 형태로 사유할 수 있어요. 자본주의와 기득권에 편향된 사회에선 각 주체들을 ‘이기적인 존재’와 ‘정치적 소비자’로 끊임없이 호명합니다. 그래야 관리가 편하니까요.
주식을 뼈다귀처럼 던져주면 우르르 달려가고, 양당제 팻말만 걸어놔도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다정하게 두 길로만 걸어가죠. ‘시민’이란 거저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걸 자각하고, 서로 공통의 삶의 조건을 위해 연대할 때 비로소 시민이 출현합니다. 당연히 이런 시민 주체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겠죠. 진보정치의 관건 중 하나는 ‘시민의 탄생’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도래할 그 시민들 말이에요.
--- p.235
세화: 요컨대 우리 세대만 해도 개천에서 용 날 가능성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능했었다는 거예요. 당시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가난했고, 부유한 사람들의 부의 크기도 지금에 비하면 범접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어요. 지금은 개천에서 용 나기가 로또 1등에 당첨될 만큼 어려운 데다, 부모들 사이의 부의 격차가 워낙 크게 벌어져 있기 때문에 자식이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의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계층화가 공고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조화된 불평등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해야 하는데, 능력주의를 주로 얘기하고 있고, 공정을 얘기하고 있어요. 저는 능력주의나 공정 담론이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기제가 되고 있다고 봅니다.
--- p.240
희일: 박근혜 정국 때 정유라가 얘기한 말이 있잖아요. 현재 한국의 모순에 대해 가장 날것의 무의식을 드러낸 거라고 봐요. “능력 없는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당시에 사람들은 이 말에 크게 분노했지만, 사실 틀린 말이 하나 없죠. 외려 정확한 표현, 진실의 증언. 뼛속까지 찌들어 있는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한 증언이 어디 있겠어요.
부모의 돈과 백그라운드 자체를 능력으로 생각하는 거죠.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때 이대생들이 시위하는 걸 보면서도 갸우뚱했어요. 정유라 입시가 자신들의 공정성을 훼손했다고 시위를 하는 건데, 문뜩 공정이란 무엇일까, 그런 의문이 드는 거예요. 명문대에 입학하려고 부모의 돈, 백그라운드,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투입됐을 텐데, 과연 그것은 공정한 걸까.
정유라의 입시 부정은 불공정한 것이고, 출발선 자체가 다른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 부모의 백그라운드가 없는 저소득 계층의 자식들 눈에 비싼 사교육을 받은 명문대 학생들의 공정 타령은 과연 공정한 걸까. 최하위 계층의 경우 70퍼센트 이상이 명문대 들어갈 확률이 아예 없다는데 말이죠.
--- p.257
세화: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두 정치세력에 포박당해 있는데, 하나는 ‘하면 안 되는 행위를 주로 저지르는 정치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라는 생각이요. 전자는 국힘당이고 후자는 민주당 세력이죠. 전자보다는 그래도 후자가 낫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떤 점에서는 그 때문에 후자가 스스로 전자에 밀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말씀하신 대로 후자의 무능과 오만이 전자를 부활시켰잖아요. 그래서 후자를 비판하면 바로 나오는 반응이 “너, 저쪽 편이구나!”예요. 이 오래된 질곡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 과제를 위해, 교육혁명이 필요하듯이 언론도 탈바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둘 다 주체적 시민 형성이 관건이라는 점에 있어요.
--- p.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