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떠나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이보게,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자네를 너무 좋아하니 도저히 못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떠나와선 기뻐하다니! 그래도 날 용서해 줄 것으로 믿네. 내가 누군가와 교분을 맺으면 으레 운명의 장난으로 내 마음이 아프지 않았던가? 불쌍한 레오노레! 그렇지만 내 잘못은 아니었어. 내 가슴은 그녀 여동생의 독특한 매력에 마냥 뛰었지. 그런데 불쌍한 레오노레의 가슴에 불길이 당겨졌으니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고 내 잘못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녀의 감정을 키운 것은 아닐까? 그녀가 마음을 아주 진솔하게 표현하면 나 자신도 흥겨워하지 않았던가? 그럴 때면 우리는 그다지 우습지 않은 말에도 걸핏하면 웃음을 터뜨리곤 했지. 그리고 내가 …… 자신을 책망하다니, 인간이란 왜 이런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이보게, 자네에게 약속하는데, 나 자신을 고쳐나갈 생각이야. 지금까지와는 달리 운명이 우리 앞에 펼쳐놓은 사소한 불행을 더 이상 곱씹지 않겠어. 나는 현재를 즐길 생각이야. 과거는 지나간 일로 생각해야지. 확실히 자네 말이 옳아. 인간들은 열심히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나간 과거의 불행을 되살리는 데 열심이야. 인간이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누가 알겠나. 그럴 게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심정으로 현재를 감내해 가면 인간들 고통이 훨씬 줄어들 텐데 말이야. --- p.15
이제 춤이 시작되었어. 우리는 갖가지 형태로 팔을 휘감으며 한동안 춤을 즐겼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얼마나 날렵했는지 몰라! 그러다가 왈츠를 출 차례가 되어 마치 천구(天球)처럼 서로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지. 왈츠를 제대로 출 수 있는 사람이 워낙 적었기에 물론 처음에는 서로 뒤엉키며 약간 혼란스러웠지. 우리는 이럴 줄 알았기에 그들이 멋대로 추도록 놔두었어. 가장 미숙한 이들까지 자리를 비워주었을 때 우리는 끼어들어 다른 한 쌍, 즉 아우드란 커플과 어울려 실컷 춤을 추었지. 지금까지 그토록 경쾌하게 춤춰본 적이 없었어.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 더없이 사랑스러운 여성을 껴안고 날듯이 빙빙 돌아다니다 보니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어. 그런데 빌헬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맹세를 했어. 내가 사랑하고 요구하는 여자가 나 이외의 다른 남자와는 왈츠를 춰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 그러다가 설령 내가 파멸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넨 내 심정 이해하겠지! --- p.46
인간이란 참으로 어린아이 같아! 눈길 한 번 마주치려고 얼마나 애타게 바라는지! 어쩌면 그렇게 어린아이 같을까! 우리는 발하임으로 갔어. 여자들은 마차를 타고 갔어. 산책하는 도중 로테의 까만 눈동자에서…… 바보 같은 나를 용서해주게! 자네도 그것을, 이 까만 눈을 봐야 해. 요점만 얘기하자면(나는 지금 졸려서 눈이 감기려 하거든), 이보게, 여자들이 마차에 올랐어. 마차 주위에는 젊은 W와 젤슈타트, 아우드란과 내가 서 있었어. 여자들은 마차 문 너머로 물론 가볍고 경박하기 짝이 없는 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어. 나는 로테와 눈길을 마주치려고 했어. 아, 그녀의 눈길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돌아다니더군. 하지만 혼자 체념하고 서 있었던 나, 나,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 나는 속으로 수천 번이나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어! 그런데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더군! 마차는 내 곁을 지나갔고, 내 눈에는 한줄기 눈물이 고였어.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를 떠나보냈어. 마침 로테가 머리 장식을 마차 문 쪽으로 기대는 모습이 보였어. 그러고는 돌아보려고 고개를 돌렸어! 아, 나를 보려는 것이었을까! 이보게! 확실히는 알 수 없지. 아마 나를 돌아보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위안 삼고 있어! 아마도! 잘 자게! 아아, 내가 어쩌면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지! --- p.67
아, 나도 모르게 내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거나 테이블 밑에서 우리의 발이 서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온몸의 피가 들끓는 느낌이야! 그러면 나는 불에 덴 듯 몸을 움찔하지. 그러다가 알 수 없는 힘에 다시 앞으로 이끌리는 거야. 이때 나의 온갖 감각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지. 아! 그런데 그녀의 순진무구함, 그녀의 구김 없는 영혼은 사소한 친밀감의 표현에도 내가 얼마나 곤혹스러워하는지 느끼지 못해. 심지어 그녀가 대화 도중 자기 손을 내 손에 올려놓거나, 상의할 요량으로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천상의 입김이 내 입술에 닿으면, 나는 벼락에라도 맞은 듯 푹 쓰러질 것만 같아. 그런데 빌헬름! 내가 이 천상의 존재를, 이 신뢰를 어찌 감히……! 자네는 내 마음을 이해할 거야. 그래, 내 마음은 그렇게 타락하지 않았어! 약한 거지! 너무 약한 거지! 그런데 약한 것은 타락해서 그런 게 아닐까? --- p.72
알베르트가 돌아왔어. 나는 떠나야겠어. 그는 너무나 훌륭하고 고상한 사람이어서 내가 어느 모로 보나 그보다 못하다는 것은 인정할 용의가 있어. 그렇다 해도 그토록 수많은 완벽함을 소유한 그를 내 눈앞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겠지. 소유라! 여하튼, 빌헬름, 약혼자가 돌아왔어! 누구나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지. 다행히도 나는 그를 맞이하는 자리에 없었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가슴이 찢어졌을 거네. 그는 또한 너무 존경할 만한 사람이야. 내가 보는 데선 로테에게 한 번도 입맞춤하지 않았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거야! 그가 로테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니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어. 그도 내게 호감을 보이더군. 그런데 그건 그 자신의 느낌이라기보다는 어쩐지 로테의 업적인 것 같아. 그런 점에서 여자들은 섬세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때문이지. 자신을 숭배하는 두 남자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언제나 여자에게 득이 되는 거지. 물론 그런 관계가 유지되긴 어렵긴 하지. --- p.78
불행한 이여! 넌 바보가 아닌가? 너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닌가? 왜 이렇게 끝없이 미쳐 날뛰는 열정에 사로잡힌단 말인가? 나는 오직 그녀만을 위해 기도하지.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의 모습만이 떠올라. 그리고 내 주위의 세상 모든 것을 오로지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만 바라본다네. 그러면 얼마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 그러다가 결국 다시 그녀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네! 아, 빌헬름! 때로 내 가슴이 왜 이다지도 나를 몰아붙이는지! 두세 시간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자태와 몸가짐, 천사 같은 말투에 취해 있노라면, 차츰 모든 감각이 팽팽히 긴장되어 눈앞이 아득해지고 귀도 거의 들리지 않아. 그리고 암살자가 내 목이라도 조르는 듯 숨이 막히면 내 가슴은 사납게 고동치며 답답해하는 감각에 숨통을 틔우려 하지.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네. 빌헬름, 나는 내가 과연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가끔 있어! 그리고 때로는 슬픔에 사로잡혀 로테의 손을 잡고 실컷 울어서라도 답답한 심정을 달래보려 하는데, 그녀가 이런 한심한 위안도 허락해 주지 않으면 나는 바깥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어. 그리고 저 멀리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네. 그럴 때면 가파른 산을 기어오르고, 몸에 상처를 내는 산울타리와 내 몸을 찌르는 가시덤불을 헤치며, 길 없는 숲속에 길을 내며 뚫고 나아가는 것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는다네! --- p.101
사랑하는 로테, 이렇게 심란한 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그대가 본다면! 내 감각이 얼마나 메말라 버렸는지! 한순간도 마음이 충만한 적이 없고, 한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마치 요지경 앞에 선 기분입니다. 난쟁이 인형과 말이 눈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헛것을 보고 있지 않나 스스로에게 묻기도 합니다. 나는 함께 놀이에 끼어듭니다. 오히려 꼭두각시처럼 조종을 당하지요. 그러다가 때로는 옆 사람의 손을 잡았다가 나무로 된 손인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 움찔하기도 합니다. 밤이면 일출을 보겠다고 마음먹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잠자리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합니다. 낮에는 달빛을 즐겨야겠다고 기대하지만, 막상 밤이 되면 방안에서 꼼짝 않고 있습니다. 왜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왜 잠자리에 드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 p.120
그래, 그런 거야. 자연이 가을로 기울 듯이 내 마음과 주위 세계도 가을이 되고 있어. 내 마음의 나뭇잎도 노랗게 물들고, 주위의 나뭇잎들도 벌써 떨어져 버렸어. 내가 이곳에 막 왔을 때 어느 하인 이야기를 한 적 있지? 나는 최근 발하임에서 그를 다시 수소문해 보았어. 일하던 집에서 쫓겨났다는데, 더 이상은 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더군. 어제 다른 마을로 가던 도중 그 하인과 우연히 마주쳤어.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는 자신의 지난 얘기를 들려주었어. 그 이야기에 나는 두 배, 세 배는 감동받았다네. 자네도 그걸 들으면 쉽게 이해될 거야.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시시콜콜 다 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나를 불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어째서 나 혼자 간직하지 않는 걸까? 내가 왜 자네까지 슬프게 하는 걸까? 어째서 나는 항상 자네가 나를 가엽게 여기고 나를 책망할 기회를 주는 걸까? 그러려니 해야지, 이것도 내 운명에 속하는지도 모르니까! --- p.142
“이제 결심했습니다, 로테, 나는 죽으려 합니다. 나는 이 편지를 낭만적 과장 없이 차분히 씁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다음 날 아침에 말이오.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면 이미 차가운 무덤이 딱딱하게 굳은 사람의 유해를 덮고 있을 거요. 안식을 얻지 못해 불행했던 사람이지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을 알지 못한 사람이지요. 끔찍한 밤을 보냈습니다. 아, 고마운 밤이기도 했지요. 내 결심을 확고하게 정한 밤이었으니까요. 나는 죽으려 합니다! 어제는 극도로 흥분해서 당신을 뿌리치고 나왔는데, 그 모든 일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희망도 즐거움도 없이 당신 곁에 있는 내 신세가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내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제정신을 잃고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 하느님이시여! 쓰디쓴 눈물이라는 마지막 청량제를 주시다니요! 수많은 계획과 전망이 마음속에서 마구 날뛰었지만, 마침내 나는 죽으려 한다는 마지막 한 가지 생각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러고는 자리에 누웠습니다. 아침에 평온한 마음으로 깨어났을 때도 죽으려는 그 생각은 여전히 확고하고 옹골차게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결심은 절망의 산물이 아니라 내가 견뎌냈으며, 당신을 위해 희생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요, 로테! 내가 굳이 숨겨야겠습니까? 우리 세 사람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하니, 내가 사라지겠다는 겁니다! 오, 내 사랑! 이 갈가리 찢긴 내 마음속에 때로는 이런 생각이 미쳐 날뛰기도 했습니다. 당신 남편을, 당신을, 나를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제 결정이 났습니다! 날씨 좋은 어느 여름날 저녁 산에 올라가거든 틈만 나면 산골짜기를 올라가곤 했던 나를 떠올려주십시오. --- p.191
베르터의 심부름 소년이 나타나자 그녀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습니다. 소년은 알베르트에게 쪽지를 건네주었고, 알베르트는 태연히 부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 소년한테 권총을 내줘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심부름 소년에게는 “여행 잘 다녀오시라고 전해드려라.”라고 말했습니다. 로테는 그 말에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는데,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벽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덜덜 떨면서 권총을 집어 내리고 먼지를 닦아낸 뒤 우물쭈물 망설였습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남편이 뭐하느냐고 묻는 듯한 눈초리로 재촉했습니다. 그녀는 그 불길한 물건을 소년에게 건네주면서 한마디 말도 입 밖에 낼 수 없었습니다. 소년이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하던 일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말할 수 없이 불안한 심정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음속에 온갖 끔찍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당장이라도 그녀는 남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어젯밤에 일어난 일과 자신의 잘못 그리고 자신의 예감을 모두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러다가 어떤 결말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남편을 설득하여 베르터에게 가보라고 하는 일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식탁이 차려졌습니다. 친한 여자 친구가 뭘 좀 물어보러 왔다가 금방 가려고 했는데, 그냥 머무르는 바람에 식탁에서 나눈 대화 분위기는 그럭저럭 참을 만했습니다.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말을 꺼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잊으려 했습니다. --- p.220
아직 이른 새벽인데도 으리으리한 궁성의 넓은 뜰에 가을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이때 이미 다소간 밝게 빛나는 안개의 베일 사이로 말을 타거나 걸어서 사냥을 떠날 무리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옆의 사람들이 서두르며 하는 일은 뻔히 알 만한 일들이었다. 이들은 등자(?子)를 늘이거나 줄였고, 엽총과 탄약 주머니를 서로에게 건네주었으며, 오소리 가방을 꾸렸다. 반면에 목에 끈을 맨 개들은 자기들도 남겨두지 말고 데려가 달라고 으르렁거리며 안달하고 있었다. 불 같은 성미 때문인지 또는 주인의 박차에 자극을 받았는지 때로 어떤 말이 보다 대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 말 주인은 여기 어스름한 가운데 무언가 허영심을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젊은 부인과 작별인사를 하느라 너무 시간을 끌고 있는 영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 p.232
날림으로 지어진 이러한 오두막에서 자는 사람들이 아직 깊은 꿈에서 깨어나기 전인 야밤에 노점이 죽 늘어선 넓은 장터에서 갑작스럽게 화재가 일어나 가게를 하나하나 덮칠 때, 사실 그 사건은 평생 동안 되풀이되는 불행의 예감과 생각을 불안하게 남겨줄 정도로 끔찍했고, 놀라움을 주었으며 인상적이었다. 피곤에 지친 나머지 먼저 잠이 들었던 후작 자신은 창가로 달려가, 좌우로 불꽃이 튀며 자신에게도 혀를 날름거리는 끔찍한 화염이 솟아오르는 모든 광경을 목격했다. 불꽃에 반사되어 붉은색을 띤 시장의 집들은 이미 이글거리는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불이 붙어 화염에 휩싸일 것 같았다. 아래에서는 자연의 기본 원소인 불이 계속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널빤지들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탔고, 판자들은 탁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아마포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양 끝에서 불이 붙어 톱니 모양이 된 음산한 헝겊 조각들이 공중에 이리저리 나부꼈다. --- p.248
“사자라고? 어디로 갔는지 발자취를 알고 있는가?”라고 영주가 말했다. “네, 나리! 영문도 모르고 나무 위로 올라가 목숨을 구한 저 아래의 한 농부가 저 위 왼쪽으로 갔다고 일러주었습니다. 하지만 일군의 사람들과 말이 앞에 가는 것을 보고 궁금한 데다가 도움이 필요해서 급히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쪽으로 사냥감이 이동하고 있음이 분명하니, 총을 장전하고 차분히 일에 착수하라.” 영주가 이렇게 지령을 내렸다. “너희들이 그 사자를 깊은 숲속으로 몬다면 다행한 일이야. 하지만 이보게, 결국 우리는 자네의 짐승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왜 단단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그놈이 달아나게 했는가?”?“불이 났어요”라고 그자가 대꾸했다. “우리는 긴장해서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불이 크게 번지더군요. 우리를 방어할 만큼 물이 충분했지만 폭죽이 폭발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불똥이 튀었어요. 우리 위를 넘어갔지요. 우리는 허겁지겁 서둘렀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 p.256
“하느님이 영주님께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현명하다는 인식을 주셨습니다. 단단하게 자리 잡고 흔들림이 없는 바위를 보십시오. 비바람에도 햇볕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태곳적의 나무들이 바위의 머리 부분을 꾸며주고 있어요. 그래서 왕관을 쓴 듯 멀리 주위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부분이 무너지면 원래대로 그대로 있지 못합니다. 수많은 조각으로 으스러지고 부서져서 비탈면을 뒤덮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그것들은 자신의 상태를 고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아래로 마구 굴러 내려가고, 시냇물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시냇물은 이를 강물로 떠내려 보냅니다. 저항하지 않고, 말을 안 듣고 반항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매끄럽고 둥글둥글해져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강을 흐르고 흘러 마침내 거인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고, 난쟁이들이 깊은 곳에 우글거리는 바다에 이릅니다.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