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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날에 목이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한다
가야한다
잊으러 가야한다
--- p.9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무덤에서 혼자 놀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무덤은 자신과 닮아 있어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소년은 집에 있는 것도, 아이들과 노는 것도 싫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말이 잘 튀어나오지 않았다. 말이란 생활에서 배운다. 아기들이 한 단어 한 단어 발음할 때마다 부모는 경이감마저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더듬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소년이 처음부터 말을 더듬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린 거미줄, 문제는 그것이다. 소년은 절규한다. 왜냐하면 그 거미줄은 양쪽을 붙들고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것이 싫다. 소년은 돌멩이를 쥔다. 그리고 힘껏 그 사이의 중심을 향해 던진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나무와 나무는 각기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그래야만 그 사이에 쳐진 거미줄과, 그것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소년의 행동이 포함한 의문을 풀 수 있다. 소년은 왜 이 풍경을 보고 고통에 빠진 걸까. 우리는 모두 이 소년이 시를 쓰는 소년임을 알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들 관념 속에 폐허와 절규, 고통의 신음 소리로 가득 찬 기도문으로 인식돼 있다. 이 소년은 자신의 시에 대해 한 산문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나를 잊기 위해 글을 쓰지만, 글을 쓰고 난 다음엔 언제나 절망하고 만다. 어떤 대상을 골랐든, 어떤 의미를 생각했든, 그곳엔 나를 닮은 것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지우려고 애썼건만 결국엔 나를 그릴 수밖에 없음에 번번이 주저앉고 만다.
―「정원을 바라보는 시간」
소년은 바라보는 사람이다. 자신을 잊기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것만 바라보고 지켜볼 뿐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내면, 자신과 닮아 있는 것뿐이다. 생각해보라. 자신과 다른 것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관찰’하는 소년을! 그래서 소년은 풍경을 빨아먹을 듯이 바라본다. 그러함에도 이 처절하리만치 지독한 응시가 자신의 내면에 비친 풍경을 인화해낸 것임은 가령 다음과 같은 시에 잘 드러난다.
무당벌레 한 마리 바닥에 뒤집혀 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놓은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화려한 유적」 전문,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이 시는 무당벌레의 무늬가 날개라는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무늬는 곧 꿈이요, 희망이다. 무당벌레는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게끔 하는 열망을 등뒤에 쌓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무당벌레는 등뒤의 꿈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꿈의 무늬가 커질수록 꿈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식도 강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강렬한 부정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그 꿈과 희망은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이 되는 것이다. 결국 무당벌레는 꿈의 확장과 그 꿈에 대한 부정 의식이 극점에 도달한 순간 뒤집히고 만다. 그 갈등의 폭발이 죽음이라는 인식이 이 시의 마지막 3행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년은 대체 무엇 때문에 무당벌레를 보며 꿈의 덫에 걸려 발버둥치는 고통스런 풍경을 보는 걸까. 아무에게나 쉽게 보이지 않는 무당벌레의 화려한 꿈을 발견해내는 소년의 놀라운 관찰력이 죽음의 인식으로 향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삶의 고통을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으로 인식하며, 거기서 하늘로 향해 오르는 “날개”를 발견해내는 소년이 끝내 삶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소년은 삶을 강렬히 열망하면서 또한 그 삶을 강렬히 부정한다. 그 사이에서 소년의 시는 씌어진다.
처음으로 돌아가,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무덤에서 혼자 놀았다. 무덤 역시 혼자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소년과 무덤은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노는 기쁨이었다. 혼자 놀던 소년은 어느새 무언가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무덤에는 수많은 것들이 기어다녔다. 개미, 무당벌레 등 곤충들이었다. 소년은 그들이 어떻게 집을 짓고, 무엇에 괴로워하는가 알게 되었다. 그런 소년의 등뒤로 저녁 어스름이 깔리면 어머니의 밥 먹으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소년은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집은 무덤 곁에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오히려 그곳은 음침한 관 속이었다. 소년은 언젠가 내게 “영혼이 자기의 의지가 있다면, 몸 속이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인 것처럼 나에게 집은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고향의 집뿐 아니라 그가 성장해서 머물게 된 도회지의 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관 속이야. 이사 가야지, 이민 가야지. 하지만 견딜 수밖에 없다.” 소년은 고향에서 집을 거부하면서 집을 떠나지 못했던 것처럼 어디서 살든 쉽게 집을 떠나지 못했다. 소년은 내게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이라는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며 견뎌야 한다고 외치고 싶었던 것일까. 끊임없이 자신이 속해야 할 공간을 키워나가면서 결코 그 공간에 자신이 속할 수 없다는 부정 의식 또한 강렬히 키워가는 이 소년. 나는 그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거미줄처럼 매달린 소년의 내면 풍경을 서투르게나마 안내하는 것을 이 글의 목적으로 삼는다.
언덕 너머엔 청동거울 같은
저수지가 있었다.
내 영혼은 검은
산속에 숨어 잠겨 있었다. 길은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오지 않는다.
―「송덕리, 노을」 부분,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지금 소년이 서 있는 언덕 너머엔 “청동거울 같은/저수지”가 있다. 소년의 영혼은 그 저수지에 숨어 있다. ‘청동거울’의 이미지는 분명 밝고 순수하며 희망찬 것이다. 그러니 그 속에 잠겨 있는 소년의 영혼은 늘 ‘청동거울’을 반질반질하게 빛내는 숨결의 동력이다. 하지만 “영혼은 검은”이라는 시행에서 보이듯, 우선 소년의 영혼은 검다. 그리고 동시에 소년의 영혼은 “검은/산속에” 있다. 즉 이 시행은 양쪽에 걸려 있다. 이 연만을 따로 분리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1. 내가 서 있는 언덕(삶)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2. 그 너머엔 청동거울 같은 저수지가 있(었)다. 내가 있을 곳은 그곳이다.
3. 내 영혼은 분명 그 저수지에 담겨 있(었)다.
4. 그런데 그 영혼마저 불행하다. 내 영혼은 검은 산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영혼은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있어야 한다.
5.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길은 저수지가 있는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나도 그 길처럼 언덕 너머로 사라져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 검은 산속에 잠겨 있는, 내 검은 영혼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6. 그러나 나는 이곳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길마저 거기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내 영혼은 오지 않는 나(현실의 나)를 기다리다 검어졌는지 모른다. 그러니 더더욱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견뎌야 한다. 내 영혼이 숨어 있는 저수지는 ‘청동거울’처럼 빛나지 않는가.
--- 발문 중에서
사방으로 찢어지는
고통의 연속이 생인 것을,
악몽의 연속이 생인 것을,
새겨주고 심어주는 대추나무.
아직도 모자라, 뒤늦게
눈곱만한 꽃들을 다닥다닥
피워낸다.
---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