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은사를 경축한다는 것은 상대의 인간성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데이브레이크에서는 서로를 그냥 사람으로 본다.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 반갑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 몇 걸음을 뗄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깨어진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그들에게서 생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들을 통해 나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세상에는 자기 비하라는 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나는 무익하고 쓸모없는 존재다. 사람들은 나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다. 만약 나한테 돈이 없다면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나한테 좋은 직장이 없다면 아무도 나를 불러 주지 않을 것이다. 나한테 영향력이 없다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성공하여 칭송받는 사람도 속으로는 자신을 못났다고 여기며 두려움 속에 살아갈 수 있다. 공동체란 서로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 상태 그대로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다른 지체의 은사를 경축할 수 있다.
--- p.41~42
고독이 공동체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까닭은 고독 속에서 우리가 서로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서로 직접 교류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혼자 기도하거나 공부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냥 조용한 시간을 보낼 때도, 사실 우리는 공동체의 성장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다. 함께 대화하거나 놀거나 일할 때만 서로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물론 그런 대인 교류를 통해 많은 성장이 이루어지지만, 고독 속에서도 그만큼의 성장이 가능하다. 우리의 고독 속에 상대방도 데려가기 때문에 거기서 관계가 자라고 깊어진다. 몸으로 함께 있을 때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방식으로 우리는 고독 속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거기서 깨닫는 상호 연대는 말이나 몸짓이나 행동에 의존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끈끈하다.
--- p.77~78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독특함에 눈뜬다. 공동체는 재능을 찾고 열매 맺는 곳이다. 여기 동질성과 독특성의 위대한 역설이 있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인간임을 인식하는 가운데 기꺼이 각자의 출중한 차이점을 버리고 서로 연약한 모습을 내보일 때, 비로소 개인의 재능이 드러날 수 있는 장이 열린다. 이때의 재능은 분열 대신 연합을 낳는 은사다. 깨어진 모습이 서로의 공통점이기에 우리의 은사는 서로를 위해 쓰일 수 있다.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획일성을 조장하거나 개인의 은사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기독교 공동체는 서로를 자세히 눈여겨보아 숨은 재능을 발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물론 그런 재능은 공동체 생활을 세우는 데 쓰인다. 우리의 자아상은 각자의 차이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자존감의 기초도 비범한 실력으로 얻어 내는 칭찬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은 사랑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의 독특한 재능이 다른 이들을 위한 은사로 보인다. 나아가 인간으로서 내 가치가 은사를 나눈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상되는 것을 깨닫는다.
--- p.98~99
기도는 과연 저항 행위다. 욕구에서 비롯된 무섭고 집요한 집착에 저항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 안에 여태 깨닫지 못한 아주 강하고 깊은 사랑의 위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고 불안과 분노와 혼란이 극심한 이때일수록, 당신이 과감히 거기에 저항하며 침묵 속에 앉아 기다리고 경청하는 일이 한없이 중요하다. 내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시편과 예언서와 복음서의 본문을 묵상하라. 말씀이 서서히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라. 그러면 내면에 주시는 평안의 위력을 경험할 수 있다. 막상 나가서 활동할 때도, 그 활동은 당신의 사무친 욕구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느끼는 풍성한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가 된다.
--- p.105
중앙아메리카의 현실에 기도와 행동으로 대응하자는 내 말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다시 확인한 것이나 같다. 우리의 소명은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 평화와 정의를 위해 힘쓰되 우리 정체성의 근원이신 그분을 결코 놓치지 않는 것, 참으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음의 권세를 거부하고 물리치는 것, 담대히 기도하면서 용감히 행동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꾀어 미움과 폭력과 전쟁에 빠뜨리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그리고 사랑과 감사와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 가는 행동을 통해 끝까지 굳게 선다. …… 저항과 구호 활동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실히 느낄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하나님과 단둘이 지내는 고독으로 그런 활동에 균형을 잡아 주어야 한다. 고독이 없으면 우리의 행동은 더는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난 운명론을 이겨 내려는 들쭉날쭉한 시도로 전락하고 만다.
--- p.151~152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과오를 범했다. 사람들을 찾아가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바란 것이다. 나는 그것을 “공동체”라 불렀지만, 대개 내가 그들에게 정말 요구한 것은 그분과의 교제였다. 완성된 느낌, 안전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사람들을 해치고 있었다. 인간의 사랑은 워낙 유한한지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인간에게 요구하기 시작하면 결국 상대를 억지로 조종하게 된다. 당신이 워낙 이것저것 많이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분과의 교제를 찾으러 나갔다가 늘 얼마간은 실망해서 돌아온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목마른 수많은 사람에게서 고통이 보인다. 그들은 문득 깨어나 깊은 슬픔에 잠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교제를 인간에게 요구하고 다닐 때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슬픔이다. 우울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무리 간절히 찾고 싶어도 그런 교제의 부재가 절절히 느껴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시 해 보자. 이번에는 되겠지’라며 늘 희망을 품고 산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조종한다. 마음 깊은 갈망을 기어이 채우려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해야 한다고 자꾸 부추긴다.
--- p.171~172
공동체의 빛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내 분노와 질투심과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 내 속에는 나조차 몰랐던 갈망이 너무도 많았다. 공동체에서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동안 차마 직시하지 못했던 내 온갖 상처가 그 더불어 사는 장에서 불거져 나왔다. 공동체는 내가 더는 숨을 수 없는 곳이다. 진정한 공동체에서 더불어 사는 이들을 아주 오래 속일 수는 없으며, 나 자신도 속일 수 없다. 공동체에서는 누구라도 성공한 이력이라는 갑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 나도 벗어야 한다. 내가 벗지 않아도 어차피 누군가가 벗기게 되어 있다. 그야말로 모두 벌거벗은 존재다.
--- p.175~176
공동체 안에서 살다 보면 여느 누구 못지않게 자신에게도 장애가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혹여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당신 역시 장애가 있다. 사실 공동체 안에서 오래 살수록 자신의 깨어진 모습과 한계가 더 많이 보인다. 그래서 때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러분, 절 참아 주셔야 됩니다. 제가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노력하겠지만 아마 또 분노가 터질 겁니다.” “당신도 저를 대할 때 어쩌면 똑같으리라는 걸 압니다. 그러니 저도 당신에게 변화를 강요해서는 안 되고 당신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지요.”
공동체가 ‘약자의 연대’임을 실제로 믿어야 한다. 공동체란 기꺼이 서로에게 늘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더 낫거나 강하지 못함에 대해 늘 서로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면, 거기서 복이 임한다. 공동체는 그것을 신뢰한다. 서로를 그렇게 용서할 수 있을 때 아름다운 경축이 가능해진다.
--- p.194~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