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한국 작가 중 보기 드문 온갖 체험을 쌓았으면서도 씨는 이런 기록자로서의 아웃사이더의 철학을 터득했기 때문에 엄청난 이야기들을 가까이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런 걸 다룰 만한 인간적 성숙과 깊이를 지닐 수 있었다. 이런 뜻에서 작가 이병주는 험난한 역사의 격랑 속에서, 분단민족사의 각박한 대결 속에서, 그리고 권력과 사회의 부침 속에서 몇몇 불행한 사건을 겪은 이후로는 이 난세를 가장 행복하게(?), 아니 가장 즐겁게 살아가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모든 역사적 비극이 씨에게는 소설적 자료로 보일 뿐이며, 이를 기록할 능력을 지닌 씨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비극적 현장을 가장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렌즈를 알맞게 갖다대기 때문에 감히 접근해보지도 못한 작가에 비하여 행복하며, 그 비극에 의하여 희생되어간 사람들에 비하여 즐거울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 - 역사적 비극 속에서 작가가 즐거울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과연 옳으냐는 문제는 여기서 논할 성질은 아니나, 이것은 이병주 문학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준다. 그는 승리자의 샴페인은 못 터뜨리나 누옥에서 소주가 아닌 맥주 정도는 마시는 행복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즉 씨가 체험자가 아니고 관찰자적 자세를 견지해왔다는 것은 곧 어떤 문제에 대해서나 초월적 자세(객관적 태도나 인식과는 다르다)를 취한 채 작품을 써왔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주인공들이 비극적인 상황에 처했더라도, 흑은 어떤 “어림도 없는 이야기”거나 민족사적 대과제일지라도, 씨는 그걸 혹은 냉소적으로, 혹은 인생론적으로, 또는 외면하듯이 그 쟁점을 차갑게 비판할 수 있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 p.14~15
작가의 생애가 격동기의 우리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작품세계가 파란만장한 굴곡의 생애를 반영하고 있는 만큼, 그의 소설을 읽는 일은 곧 근대 이래 한국 역사의 현장을 탐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특히 그가 활달하게 개방된 상상력과 역동적인 이야기의 재미, 그리고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까닭으로 당대에 보기 드문 문학적 형상력을 집적한 작가로 평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활발하게 소설을 쓰는 동안, 가장 많은 대중적 수용성을 보인 작가였다. 그런 연유로 당시에 그를 설명하는 작품의 안내 글에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대부’라는 레토릭이 등장하기도 한다.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는 말은 어디에나 적용되는 것이어서, 그렇게 많은 독자를 이끌고 있던 이 작가도 마침내 한 시대가 축조한 기억의 언덕을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작가다. 그처럼 역사와 문학의 상관성을 도저한 문필로 확립해 놓은 경우를 발견할 수 없으며, 문학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지적 토론을 가능하게 한 경우를 만날 수 없기에 그렇다. 한국 문학에 좌익과 우익의 사상을 모두 망라한 작가, 더 나아가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는 탁발한 교양의 세계를 작품으로 수렴한 작가, 소설의 이야기가 작가의 박람강기(博覽强記)와 더불어 진진한 글 읽기의 재미를 발굴하는 작가가 바로 이병주다. 그의 문학에는 우리 삶의 일상에 육박하는 교훈이 잠복해 있고, 그것은 우리가 어떤 관점과 경륜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유력한 조력자로 기능한다. 때로는 그것이 어두운 먼 바다에서 뭍으로 돌아오게 하는 예인 등대의 불빛이 되기도 한다.
--- p.314~315
장편소설 『비창』을 대할 때마다 필자에게는 불현 듯 떠오르는 오래 전의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작가 이병주와의 논쟁. 그 첫 번째. 논쟁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대표작 『지리산』(《세대》 연재, 1972-1977)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규를 둘러싼 사실적 정보의 오류에 관한 것. 작품에서 이규는 넘버 스쿨 교토(京都) 삼고(三高)의 고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런 이규가 문과병류(文科丙類) 입학 구술시험에 임했을 때, 시험관이 일본의 고명한 불문학자 구하바라 다케오(桑原武夫, 1904-1988) 교수라고, 『지리산』은 적고 있다. 그런데 실상 그 당시 구하바라 교수는 오사카 대판고등학교(大坂高等學校)에 재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비로소 그는 경도 三高로 옮겨 왔던 것이다. 필자는 어느 사석에선가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작가에게 실증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고 대들었다. 그러자 이병주 씨는 한참동안 나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김교수, 그렇다면 당신이 한번 본격적으로 「이병주론」을 써보시지 그래.”
당시 팔팔한 나이였던 나는 이를 묵살했다. 내 나름으로는 그를 한갓 ‘대중작가’로 치부했던 까닭에 여기에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거대한 실록 대하소설 『지리산』의 전체적 시각에서 보면, 그 같은 작품의 오류는 그야말로 사소한 ‘부분’에 불과한 것. 그보다는 이 작품이 지닌 참된 의미, 그러니까 “실록적 성격과 허구적 성격을 동시에 바라보는 문학적 안목”이 필요했던 것이다.
--- p.376~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