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에서 다른 요소들이 길을 결정 짓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들 같은 의사 선생님이지만, 각자의 가치관이 있고 나름의 목표가 있고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꿈을 품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모두가 같은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라고 해서, 전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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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점점 나는 세상 모두가 쫓는 목표에는 회의가 들고, 다들 하려는 일에는 관심이 줄어들었다. 대신에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지만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두 번째로 가운을 벗고, 작은 레코드 가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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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하듯 사람도 변한다. 개인의 의식뿐 아니라, 사회의 환경과 인간의 관계도 바뀌어간다. 한 개인도 하고 싶은 일이 새로 생기거나 해야 할 다른 역할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다. 18세라는 아직 어리고 성숙하지 못한 시기에 한 소년이 내렸던 직업적 결정이 평생을 가야 하는가? 그 시기의 세상에 대한 시각이나 가치관이 나이가 들어서도 변화하지 않고 계속 간다면, 도리어 그것이 더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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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역사상 수많은 의사들이 배출되었겠지만, 그들이 평생 온전하게 의업에만 종사하다가 일생을 마친 것은 아니었다. 의학을 공부하거나 의업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넓고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가치를 창조하고 보람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요즘 말하는 통섭의 선구자들이다. 의학에 다른 분야를 융합하여 더 새롭고 더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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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의학을 공부하거나 의업에 종사하다가,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여 그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그간 자신이 갈고 닦은 지식과 경험으로 그 분야만 공부했던 사람들과는 차별화될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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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길고 긴 인생에서, 그리고 한 번뿐인 생애에서 사람이 평생 오직 한 가지의 일만 바라보고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정말 넓은 곳이며, 자신이 할 일은 자신이 만들기 나름이다.
더불어 직업이란 것이 삶에서 중요하기는 하지만, 직업이란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규정할 수는 없다. 대학이나 전공이나 직업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과정인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의사라는 직업을 통하여 자신의 목표를 이룬다면 의사는 멋진 직업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꿈을 속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면, 좋다는 직업도 재고할 수 있다.
그야말로 직업은 인생에서 하나의 옷일 뿐이다. 옷은 벗을 수 있고, 바꾸어 입을 수 있다.
--- p.18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쓰다 보니, 하나하나가 인생이 아니라 차라리 역사였다. 작업을 하면서 그들의 사상과 행동에 경외심을 갖기고 했고, 그들이 걸은 좁은 길에 함께했었을 고단함과 외로움을 생각하며 눈물도 훔쳤다.
무엇보다도 가슴 깊이 깨달은 것은 그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자신의 길을 택하는 용기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 길을 가는 데에 남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는 점이다. 용기와 사랑, 이 두 가지가 그들을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가게 했고, 그들의 길을 승리로 인도했다. 인간을 고치기 위한 공부를 한 의사라면 세상도 고칠 수 있다.
--- p.19~20
드레퓌스 사건은 국수주의와 인종주의로 빚어진, 프랑스의 양심과 정의에 최대의 위기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역전에는 흔히 졸라가 최대의 공로자로 일컬어지지만, 그 뒤에 클레망소 같은 식견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었다. 졸라가 무대 위의 주연배우였다면, 클레망소는 무대 뒤의 총감독 같은 존재였다.
--- p.31
클레망소는 대외적으로 전쟁 영웅이었지만, 국내적으로는 군주제와 교회의 전횡과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저항했던 정의와 자유의 투사였다. 그는 무기 대신 웅변과 펜으로 싸웠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고 문학을 중시하며, 항상 독서하고 평생 글을 쓰고, 어디서나 신문과 잡지를 발행했다. 그는 38년간이나 독신으로 살았지만, 세상의 많은 곳을 여행하고, 어디서나 환대받았다. 실로 부러운 인생이 아닌가.
--- p.38
이 책은 소상하고 날카롭고 감동적이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학문을 이용했고, 자신의 지성뿐 아니라 피를 통하는 육체를 모두 사용하여, 세상에서 버림받고 모두가 무관심했던 땅 사할린의 실정과 가능성을 이토록 깊이 있게 써낸 책은 없었던 한명의 의학도로서 사할린으로 떠난 체호프는 이 여행에서 돌아와, 진정으로 균형 잡히고 세상을 넓게 보는 현자가 되었다.
--- p.46
시노폴리의 지휘자로서의 음악적 해석을 평가하기는 복잡한데, 그대로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개성적이며 극단적인 지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를 변호하자면 그가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는 역사학과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하며, 인물의 심리에 대해서는 정신의학과 뇌과학적 측면에서 깊은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즉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 있던 전통적이고 방만한 해석과 매너리즘에 일침을 가한 셈이다.
--- p.66
몸은 대대로 변호사였던 영국 상류층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었지만, 그는 평생 작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터지면 의사로서 의무부대 요원으로 참전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또한 당시 세상에 만연한 질병과 가난과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신에 대한 회의를 지니고 살면서도, 영국 정보부의 비밀 첩보원이 되어 국가를 위한 스파이 활동도 하는, 모순적이고 이중적면서도 모험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몸은 세상의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재능 넘치고 당대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소설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몸은 평생 그런 세속적 명예에 안주하지는 않았다.
--- p.74
칠레, 아니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사회당 정부를 수립한 최초의 대통령인 아옌데가 의사라는 사실은 그의 명성에 비해서는 잘 조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녔던 정책적 방향이나 사회적 관심의 토대는 의사라는 전문성과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항이다.
그는 포연이 가득한 대통령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정책들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가졌던 국민, 특히 빈곤층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치적인 상징성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인생은 실패가 아니다. 그는 대통령으로 서는 실패했지만, 도리어 의사로서는 자신의 정책으로서 성공한 것이 아닐까? 2008년 한 칠레 신문의 조사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칠레인’으로 칠레 국민들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선정했다.
--- p.92
평생을 의사이자 군인으로서, 군의관이자 소설가로서, 의학자이자 문학자로서, 소설가이자 또한 번역가, 평론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마치 파우스트나 괴테 또는 갈릴레이나 다빈치에 비견할 만한 왕성한 지적 활동을 벌였던 모리 오가이. 사후에 나온 ‘모리 오가이 전집’은 무려 53권이다. 그는 젊은 날 의사로서 익혔던 지식과 지위를 통해서 더 높고 더 크게 날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p.116
그리하여 체 게바라는 반항의 상징이 되었다. 분연하게 일어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행동하는 지성인의 이미지가 되었다. 열사도 혁명가도 용기 있는 자도 사라진, 이토록 순하게 길들여진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양떼목장과 같은 지상에서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티셔츠 하나를 입더라도 그 정신을 알고 입어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50년이 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인간을 그리워한다.
--- p.120
뷔히너는 철저하게 사회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역사상 많은 천재들이 좁은 연구실이나 혼자만의 서재에 갇혀 사회와 단절되거나 독선적인 성향을 가지는 데에 반해서, 뷔히너의 모든 행동은 사회적인 것이었으며 소외된 자를 향한 것이었고 결국 남을 위하고 궁극적으로 다 함께 가려고 한 것이었다.
더불어 뷔히너의 문학 작품들도 모두 세상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에서나 실생활에서나 자신의 행복보다 다른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는 일에서 보람을 찾았다. 그의 의학적 연구도 인간을 연구하고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고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강의와 실습 준비에도 최선을 다했고, 항상 기대에 부풀어서 학생들을 맞았다.
--- p.142~143
인종차별의 문제를 유럽인이 아닌 흑인이 흑인의 입장에 서 처음으로 제시하고, 피식민국가의 문제를 피식민국가의 국민으로서 처음 공론화한 사람의 한 명이 파농이다. 그는 흑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 본토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와 정신과 의사 자격을 취득한 프랑스 사람이자 프랑스 의사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의사 자격을 갖춘 다음에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가서 알제리의 현실을 보고 알제리를 위해 자신을 바친다. 그는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신하고, 알제리 독립을 8개월 앞두고 36세의 짧지만 불같은 생애를 마감했다. 프랑스인이었던 그의 장례는 조국 프랑스가 아니라 그를 국가의 은인으로 여겼던 알제리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 p.154
처음 몬테소리의 교육법이 나왔을 때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교육의 범주를 넘어서 사회를 향한 파장이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개혁이었으며, 정치와 행정의 원칙과 제도마저 새롭게 바꾸는 것이었다.
이렇게 20세기 교육에 혁명의 바람을 일으킨 몬테소리는 이탈리아의 여의사였다. 그녀는 여자는 의사가 될 수 없었던 시대에 태어나서, 숱한 역경을 헤치고 이탈리아 최초로 여의사가 된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는 장애아동을 치료하다가, 한두 명의 아이를 고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교육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임상을 넘어서게 했고, 그녀는 가운을 벗고 평생을 교육가이자 개혁자로 살았다.
--- p.169
이 위대한 소설은 인간의 삶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권력과 그 속에 서 있는 힘없는 작가의 관계를,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예수의 처형을 교차시키면서 표현한다. 언제 자신에게 처형이 다가올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낮에는 극장에서 일을 하면서, 그는 밤마다 집에서 이 소설을 썼다. 그는 이 소설이 결코 출판되지 않을 것이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매일 소설을 쓰고 수정하고 끊임없이 다듬었다. 그는 “만일 신이 없다면 누가 지상의 삶을 관장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으로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스탈린 체제를 고발했으며,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이어갔다.
--- p.193
슈바이처를 이 책에서 얘기한다면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의술을 펼친 의사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운을 벗은 의사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다.
슈바이처는 의사가 되기 전에 이미 목사로 유명했으며, 대학의 신학부 교수이자 철학자였다. 더불어 슈바이처는 오르간 연주에서 탁월한 연주력과 식견을 가진 연주가로서 유럽의 정상급 직업 연주자로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특히 음악가 바흐에 대한 깊이 있고 창의적인 저술을 통해 바흐 전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 슈바이처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위해서 봉사하기로 마음을 먹고, 선교보다는 의술을 베푸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 의과대학에 다시 진학한 것이다. 그렇게 의사 자격을 취득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 가서 자신의 힘으로 병원을 설립하고 그곳의 주민들을 위해 의술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슈바이처는 ‘가운을 벗은 의사’가 아니라 ‘가운을 입은 의사’가 되
는 셈인데, 왜 여기에서 다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는 것
이다.
슈바이처가 의사가 된 것은 의술보다는 봉사라는 개념을 먼저 앞세웠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는 의사가 목적이 아니라 봉사가 목적이었고, 다만 그 수단으로 의술을 택했던 것이다.
--- p.201~202
슈니츨러는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을 자세히 관찰하여, 병의 원인을 들여다보면서 빈의 전반적인 사회적 문제로 관심이 넘어가게 된다. 처음에는 아버지처럼 이비인후과 환자를 주로 보았지만, 점점 피부과 환자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 매독이 크게 유행하는 것을 보고는 시민들의 애정행태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그의 관심은 정신의학 쪽으로 향하고, 인간의 성적 욕망을 연구하게 된다.
그렇게 의사와 작가의 두 가지 일을 병행하던 슈니츨러는 1893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운을 벗어 던진다. 그는 이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작가의 길에만 전력을 다한다. 그는 비록 부친의 강요로 의사가 되었지만, 의학 공부는 그에게 인간을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행동을 탐구하는 방식을 훈련시켜 주었다. 그런 덕분에 슈니츨러는 빈의 다른 어떤 작가들과도 다른 방식, 즉 자연과학적 방식이나 정신분석학적 방식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었으며, 그만의 시각을 가진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 p.224~225
그렇게 개업의로 일하면서도 쑨원은 혁명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1894년에 그는 청의 권력자 리홍장에게 개혁을 주장하는 편지를 쓰는데, 리홍장은 시골의 무명 양의사(洋醫師)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쑨원은 하와이로 가서 무장혁명을 일으킬 자금을 모은다. 이렇게 중국 내에서는 혁명을 도모하고 해외에서는 혁명자금을 만들며 외국인과 화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이중적인 왕복활동을 일생 내내 반복한다.
--- p.238
의사 출신의 작가들은 문재(文才)가 넘쳤거나 문학이 너무 좋아서 작가가 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도일은 개업의로 시작하여, 다만 환자가 없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글을 썼던 경우다. 정규적인 교육 외에는 어떤 문학적 수업이나 훈련을 받은 바도 없지만, 영국 중산층이 가진 일반 교양교육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가난한 학창 시절에 헌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이 그의 상상력의 보고(寶庫)가 되고 작법(作法)의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세 가지 분야는 의학, 문학 그리고 철학(정치적 사상이 포함된 것을 말한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의사로서 개업의에는 실패했지만, 도일은 자신의 의술이 필요한 현장에 마다하지 않고 투신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바탕은 역시 불굴의 용기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인생이라는 정글 속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모험가였다.
--- p.261~262
서재필의 일생을 직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열거하자면, 무엇보다도 혁명가였으며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면서 군인이었고 언론인이었으며 정치가였고, 작가였고 또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통해서 의사라는 직업을 바탕에 지니고 의업에 종사했던 의사였다. 그는 개업의로 활동했고, 의대에서 연구하던 의학자였으며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의대 교수였다.
--- p.267
이렇게 예술계와 의학계를 번갈아 넘나들었던 밀러의 행보는 놀라운 것이며, 엄청난 재능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개의 영역에서 밀러는 모두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영국 사회에서는 한 영역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관문을 통과하고 학위나 자격증 같은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밀러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을 기득권이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도리어 밀러 같은 인물이 두 가지 영역의 경계를 넘으면서, 영역 사이의 연관관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각 분야의 기득권은 밀러 같은 경우를 못 본 체하거나 배척한다. 이에 밀러는 “유감스럽고 슬픈 일이다”라고 말했다.
밀러는 “나는 두 개의 불(火) 사이에 끼어 있었다. 질투를 받거나 경멸을 당한다. 양쪽 모두 나를 이상하게만 볼 뿐,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재주는 많지만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본다”고 말한다. 그는 사실 두 가지 영역에서 모두 최고였지만, 어디서나 아웃사이더로 여겨졌던 것이다.
--- p.295
색스는 자신이 경험한 환자들의 사례를 글로 쓰기 시작한다. 그의 글은 단순한 임상 케이스와는 달랐다. 그의 글쓰기는 신경학을 넘어 뇌과학, 과학사, 자연사 및 과학 제반 문제로 확장되었다. 또한 그는 임상 경험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전문적인 설명을 더하고, 철학과 예술을 접목하는 것에서 나아가, 환자의 입장과 고통을 묘사하여 그때까지의 의학 저술들과 차별화되었다. 색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의학에 철학과 예술을 결합시켜 높은 수준의 통합을 성취했다는 점이다.
--- p.306~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