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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짓고 싶은 저녁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시인선-060이동
리뷰 총점10.0 리뷰 5건 | 판매지수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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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4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162g | 125*200*9mm
ISBN13 9791192333090
ISBN10 1192333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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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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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금야금 시를 읽다가 별빛도 달빛도 없이 내 안광으로만 시를 읽다가 마침내 눈빛이 시들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진다면 사흘이고 열흘이고 시를 새김질하다가 살구나무에 계절이 걸리는 것도 잊고 또 시를 읽을 것이다 그렇게 시를 읽다가 살구꽃 터지는 날을 골라 내 눈에도 환장하게 핏줄 터지고 말 것이다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 나는 캄캄한 살구나무 아래에 누워 시를 읽을 것이다
--- 「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 중에서

잠시 비를 긋는 심정으로 후박나무에 기대면
저녁으로 모여든 빗물이
어깨에 스미고

신의 허락 없이는 죄를 지을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고 돌아온 사람만큼은
신도 외면하고 싶은 저녁

후박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빗물이 신의 혀끝에 박힌다
쓰라리다

인간이 눈 감는 시간을 기다려 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 「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중에서

그러나 발목까지 젖어드는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일은

저 감나무 잎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장을 캄캄하게 옮겨 적는 일

그런 뒤, 비 그친 감나무 잎 그늘에 낡은 의자를 내다 놓고 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캄캄한 문장을 팔팔 끓는 목청으로 읊어대는 일
--- 「저녁 공부」 중에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공단 지대를 경유해 온 시내버스 천장에서 눈시울빛 전등이 켜지는 저녁이다
손바닥마다 어스름으로 물든 사람들의 고개가 비스듬해지는 저녁이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문득 하나씩의 빈 정류장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중에서

무거운 재단 가위를 들고
보풀이 눈송이라면 혼자 무너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다
보풀이 꽃눈이라면
낙화, 그래 낙화의 순간까지 무심할 수 있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보풀이 악당이 아니라면
무거운 재단 가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당신이 숨을 쉴 때마다
내 심장에서는
보풀이
일었고

악당을 모르는 당신의 어깨 너머에서 해가 죽는다
--- 「보풀이 있었고, 해가 죽는다」 중에서

나는 광대처럼 너의 겨울 속에 남아야 했다

그리하여 내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는 스무 해째 보관하고 있는 너의 스물한 살 겨울이 가라앉아 있다

이후의 겨울은
밤새 이마에 젖은 수건을 갈아 얹던 손처럼
희고
차고
며칠씩 캄캄하게 깊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겨울은 없었다
너의 겨울 뒷면에서
호, 입김을 불던 저녁 어스름의 입술을 생각하면서
늙었고,
희미해졌고,

조금 더
겨울 복판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 「너의 입술에 묻은 어스름에 물들었다」 중에서

꿈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떤 피크닉도 돌아오는 길에는 시시해지는 법처럼
나의 천사는 면죄부도 없이 투신하였습니다, 두 발목에 홍실을 옭고
잠든 당신의 눈꺼풀을 꿰매듯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습니다
차고 고요한 수면이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독방입니다, 오리지널 휴먼에게 주어진 수감의 세월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겠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안도를 향해 용서 모르는 칼날이 박혀도
되겠습니까?

폭설을 머금은 북쪽처럼
후회 없는 시를 쓰며 낄낄거리다가 혼자 무서워지는 저녁입니다
--- 「나는 어쩌자고 말을 배웠을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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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시인은 어쩌자고 “살구꽃 터지는 날을 골라 내 눈에도 환장하게 핏줄”(「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이 터지도록 시를 읽는가. 어찌하여 “견습생 같은 삶”(「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일지언정 어설프지 않게 살고자 시를 공부하는가. 그의 공부는 삶에 골똘해진 저녁이자 고독한 영혼의 노래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저녁의 노래를 배우는 교실에 그를 가둬 둔 것만 같다. 그는 “캄캄한 슬픔”(「슬픔을 부르는 저녁」)에 벌게진 두 눈을 부릅뜨고 아주 낮고 길게 그늘진 삶과 캄캄한 기억을 죄다 더듬거린다. 그는 창이 깨진 독방에서 “캄캄한 문장을 팔팔 끓는 목청으로 읊어”(「저녁 공부」)대고 바람처럼 침묵을 노래한다. 어둠의 내력을 연필로 꾹꾹 눌러 기록한다. 그는 얼마나 오래 저녁 없이 저녁을 후회했고 “저녁 없는 저녁”(「가지꽃 피는 사흘이라면」)을 맞이했을까. 어쩌면 “기원 없는 가난을 밟아 가는 동안”(「헛간에 불을 놓다」), “습기와 한기를 품고 견디는 동안”(「세련」) 저녁이 저녁으로 그를 데리고 갔는지도 모른다. 열리지 않는 책이 열릴 때까지, 세상 모든 저녁이 봉긋한 시가 될 때까지 그는 계속 공부할 것이다. 그는 견습생 같은 우리에게 저녁의 감각을 선물한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는 신의 계시처럼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을 읽어야 한다. 아니 저녁의 노래들을 제대로 들어 봐야 한다. 신발을 잃어버린 우리도 “누군가의 신발을 꿰차고 사라지”지 못하고 “낯선 어둠을 활보할 수 있는”(「견습 시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 윤석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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