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떨어진다. 꽃잎의 발자국을 따라 향기가 떠오른다. 완전한 하나로 피었었던 나의 한때가 떠오른다. 내게 삶이었던 것들이 완전히 시들어 버리지는 않았음을 상기한다.
봄볕 아래, 떨어지는 꽃과 꽃 사이에도, 이제 막 문턱을 넘은 시간이 있고, 혼자만 들어가야 하는 기억이 있고, 그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과거가 있다.
꽃이 피는 봄이면 나는 자주 꽃향기에 걸려 넘어지고, 추억에 빠지다가, 가던 길을 멈춰 뒤돌아보게 된다. 꽃 지기 전에는 길을 돌아 나와야 한다. 꽃들이 여기저기 흩날리는 계절에는.. 나는 여기 질긴 삶을 붙잡고 서서,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흘러가야 하나. 따사로운 태양 볕이 강물 위에서 자글거렸다. 한 사람을 또다시 혼자 세우는 너무한 봄날이었다.
--- 「한때 내 삶이었던」 중에서
문득 길을 걷다가 바람이 불고,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나는 한 페이지의 추억이 떠 올라 한참을 멈춰 읽게 된다.
오래된 장면 속에는 넘기지 못하는 계절이 살고, 영원히 늙지 않는 여인이 산다. 여전
히 피고 지며 움트는 마음을 가꾸며 산다. 그날을 이야기해야겠다. 한때 내게 삶이었던 날들을,
마당의 높고 질긴 잡초를 뽑다가 미풍의 바람결에 머리칼을 넘기며 하늘을 한 번씩 바라 보던 그날을, 의자에 앉아 봄의 온기를 느끼던 그날을, 바람과 함께 도착한 새들이 푸드 덕거리고, 슬며시 눈을 떠보면 자두나무 가지에 열린 태양 빛이, 오후의 농익은 석양이 눈가를 반짝이며 물들이고 있던 그날을.
여전히 눈을 감으면 나는 거기에 있고, 그 속에서 땀을 흘리던 내가 있고, 울었던 내가, 가만히 부는 바람을 맛보던 내가, 꽃향기에 취한 내가, 휘파람을 부르던 내가, 빗소리를 듣는 내가 있었다.
--- 「한때 내게 삶이었던」 중에서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완전한 시간 속에서, 완전한 고통과 가난 속에서, 그보다 더 완전 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절박하고 간절하여 너무나 온전한 아름다움 속에서 단 한 번 인생이 활짝 피었던 그날을 떠올린다.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한 시작이었던 여정 말이다.
--- 「한때 내게 삶이었던」 중에서
글을 쓰다 보면 나보다 먼저 도착하는 장소가 있다. 원래 쓰려던 것과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거기서 파생된, 알 수 없는 미로를 걷다가, 부서지고 흩어진 단어를 하나하나 공들 여 줍다가 한 문장씩 연결해 보면 전혀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과거가 완성된다. 이 책은 그 렇게 쓰였다.
애초에 주제도 기획도 없던 글. 글을 쓸 때는 형식에 가두지 않는 편이다. 모든 이야기는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이다. 단지 어떤 목소리가 먼저 나를 찾아갈 것인가 따라가 다 보면 기억의 순서는 이따금 뒤바뀌고 다시 재정렬된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찾는 것 을 따르다 보면 문장은 어딘가에 나보다 먼저 가 닿게 된다. 간혹 당혹스러울 때가 많아 서, 나를 데려다 놓은 장면 앞에서 자주 한숨을 쉬곤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왔다.
실은 쓰는 날보다는 이 글을 출간해야 하나, 에 대한 고민이 더 깊었다. 무작정인 이것을 글이라 부를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단지 쓰면서 아. 그랬구나. 그랬었지. 하고 마음을 여 러 차례 쓸어내렸다.
전혀 예견한 적도, 예측한 적도 없던 글. 내가 쓰고자 마음 먹었던 시초는 실은 바다에 대한 글이었으나 이 글은 다시금 흰 여백에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바다를 지워나가 더니 무턱대고 작은 정원에 나를 앉혀놓았다. 어쩌다 보니 지난 과거의 유년 시절까지 도 다녀왔다. 하나의 이야기를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백할 수밖에 없던, 어린 시절 의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 정도는 모두 여러 개 있지 않나. 그 런 걸 공개하는 일은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이미 글은 왔고, 이미 쓰였으므로.
맴돌고 주저하다가도 또다시 샛길을 만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먼 여행을 다녀온 기 분이다. 누군가 이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면 부족함마저도 따뜻하게 품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 「한때 내게 삶이었던」 중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언젠가 다시금 그 무엇이 쏟아져 내릴 때까지, 기다려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앞으로 겪어갈 새로운 삶을 충분히 체화하며 지내 려 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동화가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하나의 몸으로 어디까지 살아볼 수 있 을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하다. 아직은 내게 쓸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과 또 앞 으로 쓰여질 이야기를 위해서, 나는 여전히 글보다는 삶을 더 믿어보려 한다. 마지막으 로 말하고 싶다.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늘 하나다. 살아 있는 것. 살아왔었고, 살아갈 것. 그것만이 살아남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아직 나의 절반밖에 채우지 못한 까닭에 나의 글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마친다. 언 젠가는 그것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먼 훗날, 내면에서, 어떤 명징한 메아리를 듣는 날
에.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완전한 시간 속에서, 완전한 고통과 가난 속에서, 그보다 더 완전 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절박하고 간절하여 너무나 온전한 아름다움 속에서 단 한 번 인생이 활짝 피었던 그날을 떠올린다.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한 시작이었던 여정 말이다.
--- 「한때 내게 삶이었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