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재난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들을 빼앗겼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은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평범한 재난들’로 가득한 ‘이상한 일상’을 살고 있다. 오래전에 이미 망가져버린 ‘이상한 일상’이 차곡차곡 쌓이다 가시화된 결과물로 드러난 자연스럽고 평범한 현상이 재난이다. 재난이 도래하기 전부터 일상은 처참히 파괴되어 있었다.
--- p.18
머지않아 우리는 재난의 시퀀스 막바지에 있을, ‘일상의 회복’이라는 이름을 한 향락주의의 유혹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재난의 위세가 잦아들고 처음의 두려움이 사그라지고 나면, 우리는 모든 걸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팬데믹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금세 과거의 일상으로 회귀해 다시 ‘즐기는 삶’을 영위할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재난을 그저 흘러간 고난이나 지나간 힘든 시절로 회상하지는 말자. 감상에 빠져드는 대신,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곧바로 사유의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냉철하게 사태를 진단하고 근본적인 대응 방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재난은 일상을 환기하고 세계를 생경한 공간으로 다시 돌아보도록 만든다. 우리는 재난을 사유함으로써 현재를 반성하고 성찰하며, 새로운 미래를 창안할 결절점結節點을 마련할 수 있다. 만일 일상이 반복되고 세계가 변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재난의 습격은 필연적이며 시간문제일 뿐이다.
--- p.19~20
팬데믹 사태는 우리에게 시급하고 중대한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진정한 영웅이란 지리멸렬한 일상을 파괴하고 변화를 가져다주는 자다. 영웅이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개방하고,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자다. 윤리란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위해 편안하고 친숙한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결단이다. 윤리는 위험을 무릅쓰며 낯선 준칙과 도덕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행동의 과정 안에 있다. 우리의 목표는 일상의 수호나 유지가 아니라 일상을 끝장내는 것이어야 한다. 일상의 폐허 위에서 다른 시작을 예비해야 한다.
--- p.20
애도는 희생자를 재현될 수 없는 ‘경험’, 언어화될 수 없는 ‘실재’, 접근할 수 없는 ‘물物 자체’로 만들어 사유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유는 그들이 겪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실재’에 ‘완전히’ 접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든 실재에 접근하려는 모든 노력을 쉼 없이 경주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희생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우정의 인사다. 애도란 희생자의 고통을 통해 지금을 사유하고 다른 세계, 즉 그들이 바라던 세계, 그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세계를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사유와 행동 속에 있다.
--- p.89
뱀파이어가 상류층이자 자본가적인 괴물이라면, 좀비는 그 기원에서부터 노예와 노동자의 정체성을 지닌 괴물이다. 좀비는 안전장치나 휴식 없이 단순하고 힘겨운 노동을 기계처럼 온종일 반복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나간다. 물론 제대로 된 임금도 받지 못한다. 이들이 차라리 기계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두교좀비는 여전히 인간이다. 이들은 괴로워하고 고통에 신음했으며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따라서 좀비가 자본주의의 몰락을 꿈꾸며, 세계의 끝을 갈망하는 괴물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좀비는 태생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의 잔여물이자, 자본가의 안티테제에 해당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 p.104~105
좀비의 진화는 자본주의의 진화와 공명하고 짝을 이루며 진행된다. 좀비가 강력해지고 빨라진 데에는 자본주의의 팽창과 파괴의 속도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가속화했다는 사실이 그대로 반영된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좀비가 힘을 얻고 활약할 환경을 마련해준 셈이다.
--- p.105
좀비의 냉혹한 복수는 한순간의 극적인 종말을 추구하기보다, 느리지만 거스를 수 없는 재난으로 퍼져나가 자본주의를 파멸로 몰아가는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태업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점유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과 유통을 중단하고,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을 소진하는 종말이다. … 좀비는 자본주의의 오래되고 근원적인 타자다. 빠른 속도로 뛰어다니기 시작한 좀비는 자본주의가 구축해놓은 물류 라인과 이동 경로를 이용해서 효과적으로 인간을 살육하고, 빠르게 그 수를 불려 자본주의의 작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중단시킨다.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좀비는 자본주의를 향한 거스를 수 없는 심판이자, 피할 수 없는 필연적 파국이다. 제국주의 시대가 낳은 극심한 인종차별의 산물이자 노예제로부터 탄생한 좀비는 자본주의의 억압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그에 걸맞은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괴물로 진화해 세계의 마지막을 상상한다.
--- p.108~109
좀비 영화에서 맞서 싸워야 할 위협은 지구 바깥의 소행성이나 외계인이 아니다. 위기는 아버지가 그동안 애써 만들어 유지하고 떠받쳐온 세계 자체에서 초래된다. 몰락한 건 다름 아닌 아버지의 세계다. 아버지는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괴물이다. 아버지에게 가족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바로 지옥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아버지가 바로 지옥이다. 아버지는 세계에 재난을 가져다준 장본인이다.
--- p.217
아버지의 세계가 종말하지 않는다면, 글로벌 자본주의의 파괴와 약탈을 멈출 수 없다면, 재난은 결코 종식되지 않는다. 재난은 다른 형태로, 더 파괴적인 버전으로 부단히 갱신되며 반복해 도래할 것이다. 재난의 종식을 위해 요청되는 것은 ‘새로운 일상’(뉴노멀)이 아니다. 백신은 ‘일상의 포기’다.
우리는 ‘종말의 종말’을 감행할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가 감내해야 할 역설이 있다. 종말은 끝나지 않으며 한없이 이어진다. 진정으로 종말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종말을 실행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일상의 회복을 위해서는 일상을 끝장내야 한다. ‘종말을 끝장내기’ 혹은 ‘종말을 종료하기 위한 결단’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의) 종말’에 종언을 고하기 위해, 우리는 ‘(일상의) 종말’을 결단해야 한다.
--- p.239~240
사건은 하나의 종말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가능성이다. 사건은 일상을 종결짓고 상황 전체를 재구조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방한다. 사건은 카오스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던 유토피아를 대지 위로 떠오르게 한다. 떠오른 유토피아는 아직 명백하게 가시적이거나 실현된 세계는 아니지만, 현실의 잠재태로서 미래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유토피아는 주체에게 익숙한 세계의 종말을 요청한다.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해 잠재된 세계를 보편화, 현실화하는 행동으로 나설 것을 요청한다. 유토피아라는 긍정의 비전을 굳건히 간직하는 주체는 지금과는 다른 삶, 다른 인류, 다른 세계를 향해 꿋꿋이 걸어간다.
--- p.273
최후까지 고갈되어버린 인간, 그것은 다름 아닌 좀비의 형상을 지시하는 단어다. 좀비는 최소한의 몸짓만을 남겨두고 스스로 소진되어버렸다. “나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 일과 언어와 표정과 활력을 전부 잃어버린 나에게 가능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의 느린 동작은 하던 일의 우스꽝스러운 패러디이며, 이미 죽어버린 세계의 희미한 그림자다.
좀비는 세계의 끝에 서서 무대도 관객도 없이 홀로 무언극無言劇을 공연하는 고독한 예술가다. 나는 아주 힘겹게, 하지만 분명한 몸짓으로 타인을 소진시키고 사물들을 소진시키고, 마침내 세계 전부를 소진해버렸다. 마침내 나는 “여기에는 아무것도, 찾아볼 만한 건 아무것도 없고, 남아 있는 말을 줄여줄 만한 것도 전혀 없”게 만들었다.
--- p.319
재난은 세계가 이대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근본적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진실을 시시각각 일깨운다. 미래는 아직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잠재된 세계는 가능성들 너머에 자리한다. 그것은 상황과 일상으로부터 해방될 때 떠오른다. 눈앞에 현시된 손쉬운 답을 거부해야 한다. 주어진 답은 함정에 불과하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모두 제거할 때 생각지 못한 대안이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즐기는 삶을 폐기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소진할 때 어렴풋한 윤곽을 드러낸다. 불가능한 미래가 가능성의 지평으로 떠오른다.
--- p.32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