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기쁜가 봐요!” 나직이 살짝 속삭였다.
문득 얼굴을 들자 바로 눈앞의 샛길을, 원피스를 입은 청결한 모습이 살랑살랑 뛰다시피 걸어갔다. 하얀 파라솔을 빙글빙글 돌렸다.
--- p.9 「만원」 중에서
나는 선 채로 울었다. 험악한 흥분이 눈물로, 아주 기분 좋게 녹아 없어져 버린다.
졌다. 이건, 좋은 일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승리는, 또한 내일을 위한 나의 출발에도, 빛을 비춘다.
--- p.16 「황금 풍경」 중에서
난, 너무나 쓸쓸해서 지지난해 가을부터, 혼자 그런 편지를 써서, 나에게 부쳤던 거야. 언니, 멍청하다고 여기지 말아 줘. 청춘이란, 굉장히 소중한 거야. 난, 병에 걸리고 나서, 그걸 똑똑히 알게 됐어.
--- p.25 「벚나무와 마술피리」 중에서
가을 해수욕장에 가 본 적이 있나요? 바닷가에 그림 무늬 양산이 찢어진 채 밀려오고, 환락의 흔적, 일장기 초롱도 버려지고, 장식 비녀, 휴지, 레코드 파편, 빈 우유병, 바다는 불그스름하니 탁해져 철썩철썩 물결치고 있었다.
--- p.29 「아, 가을」 중에서
여러분, 개는 맹수다. 말을 쓰러뜨리고, 드물게는 사자와 싸워 정복하고 만다는 얘기도 있잖은가. 그럴 만도 하지. 나는 혼자 쓸쓸히 받아들인다. 개의 그 날카로운 엄니를 보라. 보통내기가 아니다. 지금은 저렇듯 거리에서 무심한 척 하잘것없는 존재인 양 자신을 비하해 쓰레기통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본디 말을 쓰러뜨릴 만한 맹수다.
--- p.31~32 「축견담」 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조용히 기대해 주는 사람이 있어. 난, 신뢰받고 있어. 내 목숨 따윈, 문제가 아니야. 죽음으로써 사죄를, 어쩌고 하며 마음 착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야. 나는, 신뢰에 보답해야만 해. 지금은 오로지 이 한 가지. 달려라! 메로스.
--- p.63 「달려라 메로스」 중에서
헤어지겠습니다. 당신은 거짓말만 했습니다.
--- p.68 「여치」 중에서
도쿄 팔경. 나는 이 단편을 언젠가 천천히, 공들여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십 년간의 내 도쿄 생활을 그때그때의 풍경에 내맡겨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올해 서른두 살이다. 일본의 윤리에 비추어도 이 나이는 이미 중년 단계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또한 내가 나의 육체와 정열을 더듬어 봐도, 슬퍼라,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기억해 두는 게 좋아. 넌, 이미 청춘을 잃었어. 제법 점잔 빼는 얼굴을 한 삼십 줄 남자다. 도쿄 팔경. 나는 이것을 청춘에 대한 결별 인사로서, 아무한테도 알랑거리지 않고 쓰고 싶었다.
--- p.88 「도쿄 팔경」 중에서
만년 젊은이는 배우의 세계다. 문학에는 없다.
--- p.89 「도쿄 팔경」 중에서
대체 나는, 매일 여기에 앉아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요? 어떤 사람을? 아니에요, 내가 기다리는 건,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요. 나는 인간을 싫어해요. 아니에요, 무서워요.
--- p.122 「기다리다」 중에서
성격의 희비극이라는 겁니다. 인간 생활의 밑바닥엔 늘, 이런 문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 p.148 「혹부리 영감」 중에서
“사람은 제각기 살아가는 방식을 갖고 있지. 그 방식을 서로 존경할 수 없나?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도록 애쓰며 고상하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 성가셔 죽겠어!” 하고 힘없이 한숨짓는다.
--- p.151 「우라시마 씨」 중에서
“네, 그렇습니다. 말이란, 살아 있다는 불안감에서 싹튼 게 아닌가요? 썩은 땅에서 붉은 독버섯이 돋아나듯, 생명의 불안이 말을 발효시키는 게 아닌가요? 기쁨의 말도 있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천박하게 꾸며져 있잖아요? 인간은 기쁨 속에서조차 불안을 느끼는 걸까요? 인간의 말은 모두 꾸밈이에요. 잘난 척하는 거죠.”
--- p.180 「우라시마 씨」 중에서
“내가, 너한테 무얼 잘못했단 말이냐. 반한 게 잘못이냐?”
--- p.217 「카치카치산」 중에서
“난 말이지, 아니꼽게 들리겠지만, 죽고 싶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죽는 것만 생각했지. 모두를 위해서도, 죽는 편이 낫습니다. 그건 뭐, 확실해. 그런데도 좀체 죽지 않아. 이상한, 무서운 하느님 같은 분이, 내가 죽는 걸 말립니다.”
--- p.275 「비용의 아내」 중에서
“비인간인들 뭐 어때서요? 우린, 살아 있기만 하면 돼요!”
--- p.280 「비용의 아내」 중에서
아아! 살아간다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야. 특히 남자는 괴롭고 슬프지. 아무튼 무엇이든 싸워서, 그리고 이겨야만 하니까요.
--- p.292 「미남자와 담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