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현상이 또 나타날 것 같으면 그 낌새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그동안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거품을 겪고 또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매번 그 거품이 오는 것을 예견하지 못하는 것 같다. 18세기 프랑스에서부터 20세기 일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숱한 ‘거품’에 휩쓸렸고 각종 ‘붕괴’로 초토화되었다. 이 장에서는 ‘효율적시장 가설(efficient-market hypothesis)’로 알려진 시장 행동 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이 가설은 1960년대에 처음 소개된 이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장에서 대량으로 거래되는 상품의 가격이 바로 해당 상품에 대한 ‘적정가격’이라는 것이다. 가용한 모든 정보가 이 가격에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장가격이 적정 수준에서 벗어났을 때는 눈치 빠른 차익 거래자들이 치고 들어와 엄청난 차익을 챙길 것이고, 이 과정에서 시장가격이 다시 적정가격 수준으로 복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정 수준이라 여겼던 가격이 그다음 날 바로 20퍼센트 이상 떨어질 수도 있다. 즉 이 이론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효율적시장 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급작스런 가격 붕괴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이러한 논란을 잠재우려 한다. 시장은 거래되는 모든 상품에 대해 끊임없이 ‘적정가격’을 정하려 하고 이 과정에서 가격 조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돈을 몽땅 날리고 난 후 이렇게 가격 조정이 이루어져봐야 별 소용이 없다. 시장은 항상 ‘옳다’는 믿음이야말로 불의의 일격을 당하는 지름길이다. ---「왜 이번만은 다르다고 생각하다가 늘 당하는가? - 객관적이지 못한 사고」
사실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수많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소수 자산관리자의 행동이다. 실제로 자산관리자들은 개인 투자자들이 맡긴 거액의 투자금으로 거래한다. 결국 대량 거래는 주로 이들 자산관리자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산관리자들은 개인 투자자와는 사뭇 다른 투자 동기를 지니고 있다. 즉 이들은 실제로 수익을 내기 바랄 뿐 아니라 수익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차익 거래자는 역투자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데 비해 자산관리자는 기본적으로 대세를 따르는 전략을 구사한다. 요컨대 차익 거래자는 주가가 ‘적정’가격에서 벗어났을 때 이 잘못 평가된 가격 상황을 이용하여 차익을 실현한다. 차익 거래자의 이 같은 행동은 주가를 원래의 적정가격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어쨌거나 자산관리자는 이들 차익 거래자와는 완전히 상반된 전략을 취한다. 자산관리자에게 최악의 상황은 시장 평균을 밑도는 실적을 내는 것이다. 시장 전체가 하락세를 탈 때는 투자자를 대하기가 좀 편하다. 이럴 때는 실적보고서를 쓸 때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면 된다. “이번 분기는 장세가 너무 안 좋아서….” 반대로 자산관리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보고서의 서두를 장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번 분기는 초강세 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왜 이번만은 다르다고 생각하다가 늘 당하는가? - 객관적이지 못한 사고」
1980년대에 일본 재무성은 기업들이 투기를 통한 수익으로 자사의 경상이익을 증가시키는 행위를 허용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재테크(zaitech)’라고 하는데 이는 ‘금융 공학’ 혹은 ‘재무 기술’을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 재테크 덕분에 일본 기업들은 투기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수익에 부과되는 자본이득세도 면제되는 혜택을 누렸다. … 일본은 상대적으로 작은 섬나라인 만큼 기업의 가치는 그 기업이 소유한 토지와 기타 자산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은행이 부동산개발업자와 기업에 대출을 해주어서 부동산과 주식의 가격이 상승했고 은행이 대출해 줄 수 있는 액수도 그만큼 늘어났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이러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을까?
거품은 꺼졌고 그 여파로 은행과 증권사는 줄줄이 무너졌다. …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은행이 소유했던 타사 지분은 자산이 아니라 부채가 돼버렸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은행의 대출 행위 또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도가 훨씬 높아졌다. 1998년 상호출자와 부실 대출로 말미암은 일본 은행들의 손실액은 각각 5조 엔(380억 달러)과 150조 엔(1조1,000억 달러)으로 추산됐다. 대규모 부채 탕감이 이루어졌음에도 손실액은 엄청났다. 투자 자본의 씨가 마르면서 일본은 신용 경색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주식 투자에서 손을 뗀 사람들은 금리는 낮아도 위험 수준은 낮은 은행 저축으로 눈을 돌렸다. 바야흐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된 것이었다. ---「왜 이번만은 다르다고 생각하다가 늘 당하는가? - 객관적이지 못한 사고」
실험자들은 스위스의 대학생 144명을 각각 격리된 공간에 배치한 다음 이들에게 취리히 이민자 수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질문에 답하도록 했다. 대개 이 ‘집단’이 내놓은 답은 옳았다. 예를 들어 이민자 수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 중앙치는 1만 명이었다. 참고로 이 질문의 정답은 1만67명이었다.
다음에는 각 피험자에게 다른 사람이 한 대답을 알려주었다. 따라서 각 피험자는 다른 사람의 대답을 참고하여 자신의 대답을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러자 피험자들이 내놓은 추정치의 편차가 극도로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서로를 모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방으로 정답과 오답의 오차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의견의 치우침 현상이 더 심해졌다. 피험자들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아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강화하거나 안심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마저도 자신과 타인의 답이 거의 비슷할 때에 한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심할 때는 자신의 답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다른 사람이 내놓은 답을 알고 나서는 그러한 확신이 흔들리는 경향을 나타냈다. ---「왜 이번만은 다르다고 생각하다가 늘 당하는가? - 객관적이지 못한 사고」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길 우리의 행동은 억압된 정서가 표출된 것이라고한다. 그리고 이 억압된 정서는 잊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정’하여 한 일은 당연히 의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공포와 욕구는 파렴치한 마케터 그리고 이들 마케터와 손잡은 광고대행사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동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이보다 훨씬 끔찍하다. 이들은 표면상 무해한 촉발 인자에 반응하도록 우리의 행동을 ‘조건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파블로프의 연구 결과에 기초해 인간의 의식으로 그 적용 영역을 넓혀보게 됐다. 인간의 모든 행동 심지어 가장 복잡해 보이는 행동마저 단순히 이 같은 본능적 반응의 결합물이거나 학습된(‘조건화’된) 반응이었는가? 파블로프의 개처럼 우리 인간도 음식을 보지 않고 벨 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도록 훈련시킬 수 있는가? 또 침 분비가 아니라 뭔가를 사도록 조건화할 수 있을까? 1921년 초에 광고대행사 제이월터톰슨(J. Walter Thompson)은 존 B. 왓슨(John B. Watson)을 고용하여 광고 업무를 지원하게 했다. 행동주의 심리학파의 창시자 왓슨은 파블로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소비자들이 사악한 상업주의자의 손에 자신들의 마음이 조작될까 불안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욕망의 과학 - 쾌락적인 사고」
이러한 배경에서 계획적 구식화(舊式化) 개념이 널리 통용됐다. 제품을 더 빨리 낡게 하여 교체 시기를 단축하기 위해 원래 능력치보다 더 낮은 품질로 제품을 생산했다. 점차 이 계획적 구식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으로 정착돼버리자 마케터들은 이제 ‘심리적 구식화’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 심리적 구식화란 어떤 제품의 기능이 다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유행에 뒤졌다는 이유로 그 제품을 교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더 오래 쓸 수 있는 주방 기구인데도 단순히 색깔이나 브랜드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제품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예전에는 스타일 혹은 유행에 민감한 구매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 극소수 상류층 인사들로 국한됐다. 그리고 그렇게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도 의류나 머리 모양, 가구, 인테리어디자인, 건축 설계 등 몇몇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주도면밀한 마케팅 기술을 통해 이러한 유형의 구매를 할 수 있는 제품군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소비자들은 유행에 맞는 최신 제품 그리고 첨단 기술 제품이 아니고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됐다. ---「욕망의 과학 - 쾌락적인 사고」
미국의 4대 담배회사가 이 블라인드 테스트를 시행한 결과, 담뱃갑에 표시된 문구를 가려 어느 담배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담배를 피웠을 때 소비자들은 네 종류의 담배 맛이 다 같다고 느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오랫동안 광고 업계에서 보내고 나서는, 성공적 광고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던 자신의 효율성은 ‘과학’보다는 ‘기술’에 더 가까운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즉 자신의 능력이 성공적인 광고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던 것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본능적 판단’에 기인한 부분이 더 컸다는 것이다. ---「욕망의 과학 - 쾌락적인 사고」
1957년에 쉐보레자동차의 총괄 매니저는 자사의 신형 모델이 차 문 여닫는 소리가 아주 크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문소리가 그 어느 모델보다 크다. 이것이 바로 대형차의 소리!’ 또 다른 광고에서는 텍사스 출신의 배우(딱 보면 석유 부자가 연상된다)가 ‘이렇게 큰 차는 처음이야!’라고 외친다. 이 광고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이렇다. 텍사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며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엄청난 부자인 이 텍사스 사람이 ‘이렇게 큰 차는 처음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차는 엄청나게 크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은 상징조작을 당한 것이다. ---「욕망의 과학 - 쾌락적인 사고」
공화당 지지자였던 세 명의 부호가 광고계의 거물이었던 테드베이츠사(Ted Bates Company)의 로저 리브스(Rosser Reeves)에게 아이젠하워 후보를 위해 민주당의 구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대응할 만한 선전 구호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 리브스는 평범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텔레비전 광고 ‘각계각층의 사람들 - 특유의 사투리가 구성진 실제 미국 국민’에 출연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 이 광고에는 한 중년의 주부가 작은 식료품 가방을 내밀며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24달러어치예요. 보세요. 겨우 이것뿐인데 24달러라니….” 그러면 아이젠하워가 이렇게 대답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정도를 사는 데에는 10달러면 충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24달러나 되는군요. 내년에는 아마 30달러는 줘야 할 겁니다. 정권을 바꾸지 않으면 결국 그렇게 될 겁니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 젊은 엄마가 이렇게 말한다. “요즘 물가가 어떤지 아세요? 물가가 너무 올라서 정말 미칠 지경이에요.” 그러면 아이젠하워가 또 이렇게 답한다. “네, 잘 압니다. 제 아내도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잔소리를 해댑니다. 제가 ‘이제 정권을 교체해야 할 시점이다. 물가도 정상으로 그리고 달러화 가치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할 때다’라고 부르짖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 아이젠하워는 대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너무 압도적인 승리인지라 이 광고 캠페인이 대선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 로저 리브스는 광고에서 아이젠하워의 정책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후보자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생활비가 너무 비싸요!” “그래요, 제 아내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내 아이들은 정치인들이 다 부정하다고 생각해요.” “음,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지요.” 사실상 이러한 것은 사전적 의미의 정치적 공약은 아니다. ---「욕망의 과학 - 쾌락적인 사고」
1990년대 말경 엔론은 수년 동안 월가의 총아였다. … 그런데 그다음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초우량주였던 한 거대 기업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직원들은 직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연금까지 홀랑 날려버렸다. 엔론이 직원 연금을 현금이 아니라 자사 주식에 연동시킨 일종의 기여형 연금제도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엔론 직원의 60퍼센트 이상이 자신의 연금을 엔론 주식에 투자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반 직원들은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하던 매우 중요한 시기에 그 주식을 처분할 기회마저 차단당했다. 엔론의 재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들인 엔론의 핵심 경영진은 주가 하락이 시작되기 직전에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을 대량으로 팔아치웠다. 최고경영자 케네스 레이(Kenneth Lay)는 1999년 초부터 2001년 중반 사이에 보유 주식 1억300만 달러어치를 팔아치웠다. 이는 엔론이 파산 신청을 하기 겨우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엔론 계열사의 전 최고경영자 루 파이(Lou Pai)도 보유 주식을 팔아 3억5,300만 달러를 챙겼다. 엔론의 재무담당이사 앤디 패스토(AndyFastow)는 보유했던 주식을 매각하여 3,000만 달러를 확보했다(엔론은 그 업무 내용이 매우 수상쩍은 재무 법인을 설립하여 실제 재무 상태를 숨기려 했으며 패스토는 이러한 법인 설립에 일조한 공로로 엔론이 지급한 거액의 보수를 이미 챙긴 상태였다). 제프리 스킬링은 같은 시기에 6,690만 달러어치의 주식 110만 주를 매각했다. ---「큰돈을 벌게 해줄 거라는 믿음, 낙오되지 않으려는 본능적 추동 - 근거 없는 낙관주의」
레이는 CNBC포트폴리오(CNBC Portfolio)가 선정한 〈사상 최악의 미국 CEO〉에서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엔론 파산보다 훨씬 큰 재앙을 몰고 온 두 사람 덕분(?)에 레이는 1위와 2위 자리를 차지하는 수모는 면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컨트리와이드파이낸셜(Countrywide Financial)의 CEO인 앤젤로 모질로(Angelo Mozilo)와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금융서비스회사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의 CEO 딕 펄드(Dick Fuld)였다. 모질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세간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고, 펄드는 역대 최대 규모의 기업 파산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CNBC는 레이에 대해 이렇게 혹평했다.
“레이는 불량 CEO의 완결판 같은 존재다. 도덕적으로 부정직했을 뿐 아니라 관리자로서도 영 신통찮은 능력의 소유자였다. 레이는 엔론의 창설과 함께했고 이 기업을 700억 달러 규모의 에너지기업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일상적 업무 운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별로 믿을 만하지 못한 부하들에게 과도한 재량권을 주고 말았다. 그리고 대규모 회계 부정의 빌미가 된 복잡한 거래를 승인함으로써 투자자의 돈을 날리고 기업을 파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큰돈을 벌게 해줄 거라는 믿음, 낙오되지 않으려는 본능적 추동 - 근거 없는 낙관주의」
기업들이 복잡한 회계 자료를 제시하고 부외 자금을 숨기고자 교묘한(기술적으로는 합법적인) 수단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때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 특정 기업의 시장가치가 높고 앞으로 주가가 더 오를 것이라고 말하는 편파적인 시장분석가의 말은 무시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분석가가 있으면 그 주식을 팔고 해당 기업의 경영 상태를 제대로 알 때까지는 주식의 추가 매수를 중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수치 자료를 신빙성 있게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유명한 분석가들이 우리에게 자신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거나 혹은 앞으로도 주가는 더 오를 것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또 그 말대로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결산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우리는 (굉장히 똑똑하므로)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고 또 하락 장세로 전환되기 직전에 그 포지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교활한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수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매매에 임하는 은행가들과 우리는 공범이다. ---「큰돈을 벌게 해줄 거라는 믿음, 낙오되지 않으려는 본능적 추동 - 근거 없는 낙관주의」
2011년 4월 29일에는 전 세계에서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가 대학 때 만난 연인 캐서린 미들턴과 치른 결혼식을 지켜봤다. 캐서린은 ‘평민’ 출신이었다. 전문어로 말하자면 캐서린의 가까운 조상 중에는 귀족이 한 명도 없었고 직계 조상 중에는 노동자와 광부 들도 있었다는 의미다.
… 결혼식 날 이 장면을 보고자 100만 인파가 런던에 운집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행복한 신랑 신부와 나머지 왕실 가족의 모습을 보려고 장장 네 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를 지켰다. 이때는 아무런 문제도 불상사도 없었다. 이 결혼식은 평화로운 행사 그 자체였다.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나고 나서 영국 텔레비전 화면에는 이와는 너무 다른 런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두건을 쓴 젊은 패거리가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자동차와 건물에 불을 지르는 모습이 화면을 채운 것이다. … 상점과 건물이 밤새도록 불에 탔고 런던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제2차세계대전 초기에 독일군이 저지른 ‘런던 대공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이번에 런던을 불태운 것은 적군의 포탄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역을 파괴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만 같은 영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적어도 이 며칠 동안은 무차별적인 약탈이 런던 시민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크고 작은 상점이 표적이 됐고 수많은 소기업이 약탈당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직적 약탈 행위가 자행되기도 했다. … 열네 살 된 아이가 《이브닝스탠더드(Evening Standard)》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가지고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텔레비전에서 그렇게 하는 걸 봤거든요.”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나누어 배척하는 경향 - 이분법적인 사고」
무법적 약탈 행위가 끊임없이 우리 사회를 위협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문명과 그 사회는 벌써 오래전에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무너졌을 것이다. 즉 약탈적 무법자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우리는 집단이나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생존했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그렇게 흩어진 무리가 한데 모여 위대한 문명사회를 이뤘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 집단 간의 적개심을 극복하고 더 큰 사회집단을 형성할 능력이 있다는 증거다.
인간 사회가 정말로 폭동과 기회주의적 범법 행위에 끊임없이 노출됐다면 사회적 결속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마차 행렬을 이루며 서부로 떠났던 개척민들처럼 공통된 목적을 중심으로 한데 모인 집단들에서 이렇게 큰 사회로 진화해왔다. 복잡한 사회에서는 그 안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집단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불만 집단은 이유 없는 폭력과 약탈을 정당화할 계기 같은 것을 어떻게든 포착하려 한다.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나누어 배척하는 경향 - 이분법적인 사고」
월가가 중세 시대의 철학자 혹은 화학자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셈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투자자(주로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 새로운 AAA 등급 채권이 건전한 투자상품이라고 생각하고 이 채권을 매수했다. 주택담보대출 하나하나가 모여 모기지 기반 채권이 되고 이것이 다시 AAA 등급의 부채담보부채권(CDO)이 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구성된 결합 채권은 사실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큰 사람에게 제공된 대출을 그 기반으로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미국의 주택 시장 거품이 꺼지자 외국인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판단 착오에 아연실색했다. ---「왜 아무도 몰랐을까? 설마 했을까? - 비전략적인 사고」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에 우리는 ‘자아’의 힘을 빌려 우리가 했던 그 행동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 선택 대부분은 본능, 감정, 추동에서 비롯된 결과임이 드러났다. 우리는 늘 합리화를 위한 이야기를 꾸며내고 이러한 이야기를 되뇌며 우리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애써 자신을 설득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라는 것이 대개는 거짓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우리가 왜 그토록 자주 불의의 일격을 당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토대가 된다. 우리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는 대개 빠르고 ‘본능적인’ 반응들이 주가 된다. 반면에 이미 한 행동들을 되짚어 볼 때는 훨씬 느리고 에너지 소비는 훨씬 많으며 평소에 별로 사용되지도 않았던 그러한 사고 과정이 주가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같이 ‘신속한’ 사고 체계는 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광범위한 인자들로 말미암아 그 체계가 손상되기가 매우 쉽다. 이보다 심각한 부분은 ‘신속한’ 사고 체계와 ‘느린’ 사고 체계 가운데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자각하는 것은 바로 후자라는 사실이다. ---「블라인드사이드 - 생각의 사각지대」
우리는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특별히 자신이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서도 운전을 할 수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간단한 문장을 이해할 수 있고 간단한 셈을 할 수 있다. 카너먼은 이것을 ‘빠른 사고(fast thinking)’라고 부른다. 한편으로는 어떤 일을 하는 데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할 때도 있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가득한 방 안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일, 문서 한 장에 특정 글자(예를 들어 ‘다’)가 몇 개나 나오는지 세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카너먼은 이것을 ‘느린 사고(slow thinking)’라고 한다. 이 작업을 하는 데에는 신체적 노력이 필요하다. 즉 이 작업을 할 때는 심장박동 수가 증가하고 근육긴장이 일어나며 동공이 확장된다. 그런 중요한 작업을 할 때는 대뇌 자원의 일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다 신경을 쓸 수가 없다. ---「블라인드사이드 - 생각의 사각지대」
이외에도 신속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가용성(최근에 언급된 것이라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감정(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으로 이성적 평가를 방해하는 것)’, ‘인과관계 오류(실제로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사건 A가 사건 B를 유발했다는 식으로 인식하도록 프로그램화된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결정’을 유발하고 이 때문에 우리는 또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는 사실로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대체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우리는 빠른 사고 체계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편향과 체계적 오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면서 ‘우리(느린 사고 체계)’는 애초에 우리가 왜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그 이유를 인식하지 못한다. 카너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두 가지에 발목이 잡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안다고 믿는 그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불확실성과 우리의 무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블라인드사이드 - 생각의 사각지대」
우리가 합리적이었다고 믿는 의사결정은 사실 우리가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충동과 추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가져가기 전에 먼저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강력한 충동, 무리를 따르고자 하는 경향성, 정당성과 공정성을 따지려는 의식, 자신이 속한 집단은 신뢰하고 이방인은 배척하려는 심리, 과거의 재난을 기억하고 그러한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능력의 부재, 각 개인이 하는 개별적 행동의 집단적 효과를 파악하는 것의 어려움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파악되지 않은 이러한 심적 동기 요소들 때문에 우리가 그토록 쉽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곤 하는 것이다.
---「블라인드사이드 - 생각의 사각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