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도 떠날 차비를 한다. 아주 먼 길이 될 것이지만 준비할 게 많지는 않다. 하나뿐인 양복을 장롱에서 꺼내 입고 상의 안주머니에 칼과 주사위와 청산가리를 챙겨 넣는다. 칼은 염소를, 주사위는 동생을, 청산가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83쪽)
집에 돌아가. 조명등이 하나둘 꺼진다. 하얗게 빛나던 홈 플레이트가 일요일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순간, 사내의 두개골 아래에 고인 어둠이 번쩍 밝아온다. 빛나던 홈 플레이트가 머릿속에 들어앉는다. 희미해진 파울라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머릿속에 펼쳐진 새하얀 길이 사내의 눈초리를 팽팽하게 잡아당겨 놀란 표정을 만들어낸다. 사내는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아이가 들춘 야구의 진실에 부르르 몸을 떤다. --- pp. 248~249
야구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밥이고 누군가에게는 법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이고 누군가에게는 물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혼이고 누군가에게는 한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집이고 누군가에게는 길일 수 있다.
여기 집을 떠나 낯선 길 위에 선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고 아들에게는 해서는 안 될 일이 많다. 아버지의 품에는 칼이 아들의 품에는 나침반이 있다. 칼을 품은 아버지와 나침반을 품은 아들이 함께 야구를 본다. 칼을 품은 아버지에게 야구란 무엇이고 나침반을 품은 아들에게 야구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