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들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거의 진화론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지요. 이걸 진화적 창조론이라고도 하고,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부, 아니 세계적인 시각에서 보면 극히 일부지만, 한국에서 대다수인 근본주의 교회들은 전통적인 창조론이 맞는다고 아직까지도 교인들에게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신교의 종주국인 유럽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미국 교회의 30~40퍼센트, 한국 교회의 70~80퍼센트는 여전히 이런 근본주의 신앙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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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의 인격과 지성과 자유 하심을 닮았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존귀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인종이나 피부색을 떠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로 하나님처럼 존귀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을 읽는 사람들은, 사람은 스펙이나 인종, 얼굴 색깔, 학력이나 능력과도 상관없이 존재 자체로 존귀하다는 것, 하나님처럼 존귀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거스르는 죄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p.26
인류가 오랫동안 해왔던, 그러나 성경의 권위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기에 더 이상 제기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의문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만든 옛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을 동시에 만들거나 여자를 먼저 만들게 하지 않고, 남자를 먼저 만든 후에 그 신체의 일부로 여자를 만들게 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둘이 한 몸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라는 하나의 답은 의미가 있고 타당한 해석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걸로 족할까요? 더 이상 질문을 계속하는 것은 신성모독일까요? 저는 신학자들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본문의 이 서술은 남녀평등 사상에 눈을 뜨기 전, 고대인들의 한계를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서의 메시지를 정직하게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성서의 이런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에 담긴 진실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32
우리가 창세기의 기록에 갖는 의문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아담과 하와뿐인데 카인이 만났다는 사람은 누굴까, 창세기 인물들이 실제로 몇백 년씩 살았을까? 이런 질문들은 창세기의 기록을 모두 사실로, 역사로 생각하기에 가지는 질문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창세기의 앞부분은 신화의 기록이지 역사의 기록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화는 사실이 아니라 의미를 담은 이야기 입니다. 선악과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라는 인물의 실제 존재 여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창조신화, 또는 창조설화의 그 말씀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의미, 즉 창조신화가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인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 있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유지하도록 우리 인간에게 위임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 하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p.40~41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 홀로 종교’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주변의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그것은 유일신 종교들, 그러니까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문화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준 절대 계시다’라고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이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 p.44
11장에는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민족마다 언어가 갈라지기 전에,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떨치고, 흩어짐을 면하자, 단결하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성과 대를 쌓았노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이 마음에 안 들어 하시고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어지게 하십니다. 바벨이라는 말은 ‘혼잡하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바벨탑 이야기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요? 인간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할수록 교만해지기 쉽고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 하 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이 메시지에 일부 동의합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돈과 과학을 저 역시 경계합니다. 돈이 사람의 존엄성을 해치고 있으며, 과학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쓰이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현실을 수없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 p.56
예수님이 인식하신 하나님과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인식한 하나님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식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 사랑하시는 독선과 배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방인과 여자, 아이까지 모두 사랑하고 존중해주시며, 약한 자와 포로가 된 자를 더욱 어여삐 여기시는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인식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고, 그중에서도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만 인정하시는 하나님이며, 신체가 성하지 못한 장애인은 차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어도 이렇게 인식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숙제를 안겨줍니다. 하여 저는 벗님들에게, 벗님들은 과연 어떤 하나님을 믿고 계신지 자문해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 p.380~381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신앙에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써 이 땅에 천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천국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루는 천국, 그것이 새 시대 새 기독교인들의 과제라는 것이지요.
--- p.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