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낙원 같은 이곳에서는 차라리 고독이 나에게 귀한 향유의 역할을 해주고 있어. 게다가 청춘의 계절이라 할 이 봄이 두려움에 떠는 내 마음을 온갖 풍요로움으로 포근히 어루만져주곤 해. 나무와 덤불마다 온갖 꽃이 만발했어. 오죽하면 향긋한 꽃향기의 바다를 누비며 그 속에서 온갖 자양분을 맘껏 섭취할 수 있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되고 싶을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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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절대 내가 착각한 게 아니야! 나는 로테의 검은 눈동자에서 나와 내 운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봤어. 맞아, 나는 그렇게 느꼈어.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을 믿어. 로테는―아, 천국을 이런 말로 표현해도 될까, 그럴 수 있을까?―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해. 그가 나를 사랑한다니! 그런 느낌을 받은 이후 나 자신이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너라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테니 솔직히 털어놓을게. 심지어 나 자신을 숭배하고 싶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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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이런 슬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 대답해보십시오. 아까 언급했던 질병과 이번 경우가 다른 게 뭐죠? 온갖 모순된 힘들이 마구 뒤엉켜 있는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사람은 결국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라고! 시간이 해결해줄 때까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으면 절망감도 가시고 너를 위로해줄 다른 남자도 나타났을 텐데’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소서! 그건 ‘어리석은 바보 같으니라고! 그까짓 열병 때문에 죽는 게 말이 돼? 기력이 회복되고 체액이 정화되고 펄펄 끓던 열이 내릴 때까지만 기다렸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졌을 거야. 당연히 지금까지 살아 있을 테고!’라고 말하는 것과 매한가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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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혀버린 것 같아. 그러자 무한한 삶의 무대가 바로 내 눈앞에서 영원히 입을 벌리고 있는 무덤 같은 심연으로 변해버렸어. 모든 것이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인데도 너는 ‘그건 존재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번개 치듯 일순간에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존재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힘을 유지하기 힘들고, 결국에는 세찬 물살에 휩쓸려 깊이 가라앉았다가 바위에 부딪쳐 박살나버리는데도? 너와 네 주변 사람들을 소진시키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순간이란 결코 있을 수 없어. 너 또한 파괴자가 아닌 순간은 결코 있을 수 없어. 너는 항상 파괴자일 수밖에 없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산책에서조차 수많은 불쌍한 벌레들의 생명을 앗아가게 돼 있지. 단 한 발자국만으로 어렵게 쌓아 올린 개미집을 무너뜨리고 그 작은 세계를 비참한 무덤으로 만들어버려. 맞아, 어쩌다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대재앙, 마을을 송두리째 휩쓸어가는 홍수, 도시를 삼켜버리는 지진 따위는 결코 내 마음을 뒤흔들지 못해. 내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히려 삼라만상 속에 숨겨져 있는 소모적인 힘, 바로 그거야.
--- p.96
소중한 사람이여, 당신이 지금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면! 내 감성은 완전히 메말라버렸습니다! 내 마음은 단 한순간도 포만감을 느낀 적 없고 잠깐의 행복도 맛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됐습니다! 마치 난쟁이들과 조랑말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요지경 앞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혹시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자문하면서요. 나 역시 그 연극에 참여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 참여가 아니라 꼭두각시인형처럼 조종당하고 있다는 게 더 맞을 겁니다. 그래서 이따금 옆 사람의 나무손을 붙잡고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곤 한답니다. 저녁마다 내일은 꼭 해돋이를 구경해야지 결심하지만 아침이면 침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또 낮에는 밤에 달빛을 즐기겠다고 결심하지만 정작 밤이 되면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합니다. 내가 왜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 p.119
가끔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내가 이렇게 오직 로테만을 간절히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남자가 로테를 사랑할 수 있는 거지? 또 어떻게 로테를 사랑해도 되는 거지? 나는 오로지 로테만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로테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로테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말이야.
--- p.142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 저녁 산에 올라가거든 그 골짜기를 즐겨 찾았던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석양빛을 받으며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거든 저 건너편 교회 묘지에 있는 내 무덤도 한번 쳐다봐주십시오.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마음이 평온했는데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습니다.
--- p.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