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중심주의적 시선은 그대로 근대 사회과학에도 드러납니다. 비유럽 세계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더라도, 유럽의 과거가 비유럽의 현재이고 비유럽의 미래가 유럽의 현재라는 시선으로 모든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비유럽 세계는 현재 지금의 사회과학의 분석 범위에서 사실상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전 지구적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은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이처럼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전 지구적 시야를 확보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근대 세계체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지구적으로 팽창해 오면서 유럽 중심의 근대성을 전 지구적으로 각인시킨 지배적 역사가 아직도 관철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이중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강 사회변동 이론의 조망」중에서
20세기 자유주의는 개인이 공동체 내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동시에 각 개인 사이의 관계를 공동체 차원에서 관리하는 과제를 동시에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갈수록 이 두 규범의 공존에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첫 번째는 공동체의 범위 문제입니다. 개인이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을 때 어떤 공동체가 그것을 보호해 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개인이 추구하려는 가치를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다른 개인이 중시하는 가치를 사회가 제한해야 한다면 그 기준과 정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2강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케인스주의적 자유주의로」중에서
케인스주의가 금융의 억압을 조건으로서 해서 산업적 성장과 고용을 목표로 하는 재정정책을 중심으로 실행되었다면, 신자유주의는 금융의 해방과 자유화를 조건으로 해서 인플레이션 억제와 금융시장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통화정책을 중심으로 실행된다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둘 사이의 차이가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여부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국가의 경제 관리는 자본주의의 존재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 개입의 형태와 양상이지요.
---「3강 케인스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중에서
생산과 금융의 초민족화는 민족국가의 정책적 자율성을 크게 제약합니다. 자국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자본이 이동하기 때문이죠. 특히 영국, 네덜란드,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등 북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국제금융센터(IFC)’로 변모함에 따라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됩니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이곳에 법인을 등록함으로써 정부의 규제를 회피하는 것이죠. 국제금융센터는 케이맨제도(Cayman Islands)나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 같은 ‘전통적인’ 조세 도피처와 별반 차이가 없어요. 애플, 구글 등 세계적 기업들은 이곳에서 합법적으로 ‘탈세’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법인세를 인상해도, 금융규제를 다시 강화해도―사실 ‘무엇’을 ‘어떻게’ 규제해야 되는지도 모르지만―,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여전히 민족국가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롭게 위세를 떨치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합니다. 정치의 지평을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시켜도 모자를 판에, 오히려 ‘적’과 ‘인민’의 이분법 속에서 해묵은 갈등과 방향성 잃은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죠. 그럴수록 초민족자본은 세계를 배회하면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역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정치와 경제가 어긋나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가 오늘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4강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금융 세계화」중에서
세계시장에 대한 편입과 예외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기회 구조에 올라탈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었고, 그러한 조건은 발전주의 기획이 본격화된 1960년대 중반부터 신자유주의화와 금융 세계화가 진전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외향적 성장을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채택된 수출주도형 성장 체제와 그 주된 동력으로서의 재벌 체제 역시 경제 규모가 커짐에 따라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어 왔어요. 이는 비단 수출 의존도가 높고 재벌의 경제적 권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경제 제도나 시장 규범, 사회관계가 여전히 재벌 중심의 수출주도형 성장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해요. 거시경제와 산업, 자본시장을 관리하는 제도적 논리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신자유주의화된 한국 경제는 여전히 재벌 중심의 수출 경제를 통해, 심지어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글로벌 자본주의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소개한 금융 세계화의 특수성, 위계화된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의 구조 안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장의 형태가, 한편으로는 금융시장을 통한 중심부로의 자본 유출이 심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 중심의 수출 경제를 유지하는 비용이 사회 전체로 전가되는 상황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여파로 생긴 경제의 이중화와 고용 없는 성장의 추세,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화, 더구나 여기에 가계 금융화의 독특한 경향들이 덧붙여지면서 성장을 위해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이 치러야 할 비용과 희생은 더 커져 있습니다.
---「5강 한국 자본주의의 변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