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엄마의 태에서 나오던 날, 첫 등교일, 배우자를 만났던 날, 아버지를 묻었던 날, 수술받았던 그날, 첫 아이를 출산했던 날, 딸을 데리고 식장에 걸어 들어갔던 날, 다시 혼자가 되었던 첫날, 가슴을 애타게 했던 그를 잃어버렸던 그날, ‘사랑해요’라고 그가 말했던 그날, 당신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녀가 당신에게 말했던 그날, 졸업식 날, 은퇴하던 날 등등 우리가 사막을 횡단하며 만났던 모든 날에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프롤로그」중에서
조금 있다가 삼촌이 들어오신다. 멋쩍게 앉아 있던 나는 쑥스럽게 용돈을 받았다. 시청 앞 버스 정류장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차마 삼촌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주먹으로 훔쳐 씻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둑해진 하늘엔 처량한 그믐달이 저만치 보였다. 왠지 용기가 났다. 힘이 났다. 씩씩하게 걸었다. 한 그릇 우거지탕과 손에 든 용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식탁에서 보여준 외삼촌의 소박한 사랑 덕분이었다. 돌이켜보니 그곳에는 어렴풋이 “신성한 사랑의 흔적”이 있었다.
살면서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라고 느꼈던 가장 소중한 추억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대부분 식탁이나 먹는 일과 관련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우거지탕을 먹을 때마다 그 신성한 사랑의 ‘흔적’을 더듬어 거룩한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국밥 한 그릇의 사랑」중에서
내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이게 혹시 한국 교회의 민낯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는 명색이 기독교 대학의 교수였고, 교회에선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봉사하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지하 주차장에서 행한 자그마한 행동 하나에는 평소에 갖고 있던 일그러진 신앙과 신학의 몰골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습니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 장애를 가진 운전자가 그 주차장에 들어와 주차된 비장애인 차량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떠올려보기나 했을까요? 바보와 천재의 차이는 상상력의 차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급을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는 똑똑한 사람이지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바보 천지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행동 하나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중에서
악보를 보지 않고도 어떤 찬송이든 마음대로 연주하고, 그것도 변조까지 해가면서 피아노를 치면 주위에선 무척 놀란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 못 할 나만의 비밀이 있었다. 그렇게 자유자재로 찬송가를 치면서도 정작 쇼팽이나 베토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차르트를 칠 수는 없었다. 나의 열 손가락은 완전히 ‘찬송가 코드’로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라 성년이 된 후에는 남몰래 피아노 학원 문을 두드려보기도 했다. ‘모차르트를 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했다. 시간과 재정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고전음악을 연주하기에는 이미 내 손이 나만의 방식대로 굳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내가 음악에 대해, 피아노에 대해 문외한이었더라면 처음부터 좋은 선생님 밑에서 정식으로 잘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후회를 만회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늦기 전에 바꿔야 할 것들」중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광야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출애굽 한 직후 그들은 거리적으로 약속의 땅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다. 몇 주 정도만 행진하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날씨가 좋은 날이라면 망원경으로도 볼 수 있는 지척이었다. 그렇다. 약속의 땅은 아주 가까이 보이는 곳에 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생각 역시 대부분 그리 복잡하지 않다.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직장, 좋은 건강, 좋은 인간관계 등과 같은 약속의 땅에 이르기를 바란다. 자녀들은 모두 건강하고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가정에는 근심 걱정 없는 그런 삶의 고원高原에 이르기를 꿈꾼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삶과 인생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아, 이건 아닌데!” “방향이 이쪽이 아닌데.” “이리저리 부대끼며 떠내려가고 있어!” 아무리 앞을 향해 힘껏 노를 저어도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아, 뒤로 떠내려가고 있어! 뒤쪽에 천 길 낭떠러지 폭포가 있는데! 이제는 끝장이야!’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광야 속으로 이끄실까?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 따라간다면 반드시 놀랍고 장엄한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고 장엄한 그 무엇은 궁극적으로 오직 ‘힘든 길’에서만 발견된다. 거기서 변혁과 변형과 변화가 일어난다.
---「인생의 갓길을 만나거든 갓God길을 기대하라」중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목적과 의도가 있으셔서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지금껏 인도하셨습니다. 나의 한 달란트는 하나님의 ‘의도적 창조물’intentional creation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한 달란트는 오직 나만을 위해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지금의 나이길 바라시며, 주위의 다섯 달란트 사람과 같아지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삶을 예술적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누가 아닌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비록 한 달란트 사람이지만, 그 사실을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재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빛과 생명으로 나아가겠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모험이다」중에서
새가 다시 부화 전의 껍질 안으로 들아가는 것 보았습니까? 나비가 애벌레로 되돌아가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무덤으로 들어가시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십시오. 과거의 실패들과 과거의 성공들을 모두 묻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합니다. 삶의 고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인하십시오.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동방의 현자들처럼 굳세게 순례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나를 따르라 하신 그분을 따라 가십시다.
---「종교적 향수병을 극복하는 길」중에서
아마 천국에서 우리는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합창처럼 말입니다. 찬양 외에 달리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신 왕권과 주권을 높이고 찬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본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찬양보다 약간 더 절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소망하는 것입니다. 희망하는 것입니다. 마치 견딜 수 없는 시련의 화덕 속에서 욥이 내뱉은 외마디 고백, ‘내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나는 압니다!’라는 절규 속에 담긴 희망, 바로 그 소망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일 것입니다. 한 음도 말고 그저 반음半音 정도의 희망이라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례의 길 한 가운데 있는 우리는 오히려 희망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삶에 의미와 힘을 공급하여 주는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반음 정도의 희망이라도 갖고 살아야 할 이 세상, 이 세상이 아직 하나님 아들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생각하자 눈시울이 붉어진 것입니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