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문서와 역사적 서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힘없는 희생자들이 가진 것은 기억과 증언뿐이다. 그런데 증언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부정확하다. 실증주의로 무장한 부정론자들이 죄인 다루듯 증인을 압박하고 증언의 가치에 흠집을 내려고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짓말,’ ‘조작,’ ‘왜곡,’ ‘날조’ 등의 언어폭력이 역사적 비극의 생존자들에게 가해지고, 이는 ‘실증’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기억이 흐릿하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빼앗긴다. 자신의 내밀한 아픔이 타자의 실증적 언어로 규정될 때, 이들은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지 못한 데서 오는 극심한 소외감과 고통을 겪는다.
---「임지현, 들어가며―‘기억을 학살하라,’ 그들이 비극의 역사를 부정하는 법」중에서
전쟁의 역사에서 비가시화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도 낯설지 않다. 그 이름의 하나가 일본군 ‘위안부’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항상 유보의 따옴표가 쳐진다. 가난한 식민지 여성의 성을 국가가 동원해 착취한 성노예제가 전장의 군인들에게 제공되어 마땅한 ‘위안’으로 미화되었다는 끔찍한 모순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전후에도 이어졌다. 태평양전쟁 세대는 ‘처녀 공출’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았고, 1975년 배봉기, 1982년 이남님, 1984년 배옥수와 노수복이 국내외 언론에 노출되었지만, ‘위안부’는 한국의 사회적 기억에서 여전히 가라앉은 존재였다. 식민 지배가 초래한 민족 수난의 표상은 될지언정, 여성의 성적 피해라는 맥락에서 공론화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이헌미, 여자의 얼굴을 한 전쟁―일본군 ‘위안부’ 증언 이후의 풍경들」중에서
지난 40년 동안 ‘김군’과 같은 익명의 사람들은 서서히 잊혔고,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로 구성된 기동타격대는 국가의 기억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할 때 그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밀려났다. 대학생들은 신원이 확실했지만, 그들은 누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무장 세력으로서 민주화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불투명했다. 5·18의 민주화 담론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오늘날 북한군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이유다.
---「김정한, 풀뿌리 항쟁의 ‘이름’ 없는 진짜 주역들」중에서
왜 지금 오키나와인가. 그러한 물음을 갖게 된 것은 광주행을 주저하던 메도루마가 털어놓았던 80년 광주를 향한 마음을 떠올리면서부터였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를 폭격하기 위해 자신들의 섬에서 출격했던 미군기를 바라보며 공포를 느꼈던, 그리고 20여 년 후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무차별 폭격에 자신들의 섬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가장 거센 반미 투쟁을 전개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80년 5월 당시 신군부를 지원하기 위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미군 함대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영진, 5?18 그리고 ‘철의 폭풍,’ 희생의 연대는 가능한가」중에서
여기서 ‘4·3’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공적 기억과 4·3 피해 당사자 개인과 가족의 기억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은 ‘4·3의 기억’을 재현하는 포스트 기억의 범위와 다양한 매개 양식의 위계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4·3의 모든 피해자가 ‘희생자’의 신분을 자동적으로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희생자’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위하여, 피해자의 기억은 국가의 기억 안에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모순적인 요구를 하게 된다. 여기서 죽음의 윤리적 가치를 판단하고 위계화하는 의례적 경합의 정치학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제주4·3의 문화적 트라우마의 전승과 관련하여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에서, 4·3 희생자와 시신에 대한 문화적 믿음과 도덕적 관념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의례적 경합의 정치학과 탈냉전 시대의 기억의 윤리에 대하여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김성례, 제주4?3 사건의 위령―트라우마와 포스트 기억의 정치학」중에서
천안문민주화운동 당시에 대한 회고문 등 기록을 보면 노동자와 타지방 거주민 등도 많이 참여했으며, 이들에게 당시의 천안문 시위는 일상을 잠시 멈춰 세운 휴업, 휴강, 휴식의 카니발 공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통계들이 당시 희생자들의 대다수가 일반 시민들이었다고 기록한다.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민주화라는 목적의식하에 강력한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다 희생되었다는 기억은 매우 중요한 구성 부분이지만, 이 기억은 당시 참여했던 많은 이들의 각양각색의 기억을 더하여 더 풍부해질 수도 있다. 집단기억의 풍부화는 단지 더 많은 개별 기억을 포함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소리, 음성, 후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 영역을 발굴해내는 것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농민 여성들이 옷감에 새겨 넣은 기억의 흔적 등 문자나 시각 이미지가 아닌 여러 형태의 기억들은 기억의 전 세계적 연대를 확대할 것이며, 이는 부정론자들의 증거 물신주의를 에워싸는 포위 전선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홍지순, 천안문, 중국과 서구의 집단기억 정화」중에서
재난에는 준비와 대처, 복구라는 키워드가 뒤따른다. 그러나 재난에 대한 기억, 그 아픔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강남역 10번 출구와 구의역 승강장 9-4 스크린도어에 붙은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물결을 기억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내가 거기 없었기 때문에 네가 죽었어”라고 말하는 문구들은 재난의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거리에서 실현된 기억의 아카이브였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줄곧 피해자의 위치에 서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들의 아픔을 교감하고 현실의 변화를 요청하는 소리였다. 재난이 있는 곳에 아카이빙이 있어야 한다. 기록을 담은 장소로서 ‘아카이브’는 과거가 보존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기억이 만들어지는 장소다. 아카이빙 작업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회적 참사와 재난에 대한 아카이브는 누구의 그리고 누구를 위한 기억을 담고 있는가? 재난의 기록이 진상 규명과 대처를 중심으로 한 사건 기술을 넘어서 미래의 상상에 열린 창조적 작업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재난의 정치적 미학을 상상할 것인가? 재난 아카이브의 중요성은 최근 전 세계에서 공유되고 있는 상황이다.
---「박현선, 모든 것을 무릅쓴 기록들, 재난 아카이브」중에서
‘기억전쟁’은 과거와 과거의 전쟁이 아니다. 기억이라는 상징을 앞세운 현실 정치투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부터 효창공원을 두고 벌어졌던 논란을 보면, 효창공원의 ‘기억전쟁’은 현실 정치투쟁임이 더 명확해진다. 같은 장소에서 호명되는 대상은 동일하지만 갈등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국회에서는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만들기 위한 법안이 수차례 발의되었다. ‘민족정기’를 강조한 법안을 발의하면 역사관이 올바른 정치인이란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인지, 다양한 정당 소속의 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하거나 지지했다. 하지만 정작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중략)… 혹시 효창공원의 국립묘지화를 반대했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결국은 돈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묘지는 기피 시설 혹은 혐오 시설이고, 아무리 독립운동가의 묘역이라 할지라도 묘지는 묘지일 뿐이다. 효창‘공원’이 아니라 국립‘묘지’가 들어서면 개발 이슈가 사라져 땅값과 집값은 하락할 것이 뻔했고…(후략)….
---「정일영, 민족의 토포필리아 자본의 토포포비아, 효창공원」중에서
한국 사회는 성과 사랑, 오락, 유흥과 같이 주한미군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과 비용을 기지촌 여성 개인에게 맡겨두었다. 때로 여성들을 “당신들이야말로 외화 버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우기도 하고, 때로 ‘양공주’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이제 민주화된 신개발주의 아래에서도 가난한 여성 개인의 희생과 추방이 요구되고 있다. 미군 주둔이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들과 아이들에 대한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불건전한’ 기지촌 여성을 겨냥한다. 기억은 그것을 촉발하는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고자 하는 의지와 분리될 수 없으므로 언제나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이태원을 기지촌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여성과 이들에 대한 혐오를 동원하며 발전을 거듭한 한국 사회의 역사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부동산 개발의 광풍에서 속절없이 밀려나는 여성을 위한 정의의 프레임을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주희, 이태원×기지촌, 혐오와 망각의 투기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