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은 평생 108개의 교향곡(symphony)을 남겼습니다. 하이든과 동시대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41곡, 후대인 베토벤이 9곡, 브람스가 4곡의 교향곡을 남겼다는 사실을 볼 때 하이든이 얼마나 열심히 교향곡을 썼는지 알 수 있죠.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하는 건 단순히 그가 많은 교향곡을 남겨서가 아닙니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타나 작품을 일컫는 교향곡은 원래 이탈리아 오페라의 서곡(sinfonia)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외에도 68개의 현악 4중주, 26개의 오페라와 셀 수 없이 많은 협주곡, 세레나데, 바리톤 트리오 등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 수를 보면 쉬지 않고 작곡만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가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긴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샘솟는 창작력? 음악을 향한 넘치는 열정? 물론 하이든은 성실한 천재였던 터라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그의 신분에 있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그때 그 시절엔 유니폼 입은 하인」중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피아노를 연주할 배짱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국에선 저녁 9시만 넘어도 피아노를 칠 용기가 안 날 겁니다. 그랬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릴 테니까요. 그런데 악성(樂聖)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깊은 밤이든 이른 아침이든 가리지 않고 피아노를 쳐대는 사나이였습니다. 베토벤은 독일 본에서 태어났지만 스물두 살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한 뒤 사망할 때까지 35년간 빈에서 살았습니다. 평생 독신이었던 베토벤은 공동주택에서 방을 빌려 사는 하숙 생활을 했는데, 층간 소음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베토벤 아랫방에 살았다면 견디다 못해 이사를 갔을 거예요.
---「루트비히 판 베토벤, 35년간 무려 60번 넘게 이사 다닌 삶」중에서
베토벤, 하이든, 리스트, 바그너 등 19세기의 위대한 음악가 몇몇은 데스마스크(death mask)를 남겼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이들의 말년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죠. 이 중에는 38세에 요절한 천재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의 데스마스크도 남아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데스마스크를 보면 마흔도 채 안 된 남성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습니다. 5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죠. 멘델스존은 30대에도 흰머리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왜 이렇게 늙어버렸던 걸까요.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 과로로 너무 일찍 늙어버린 청년」중에서
1836년 10월 밤, 가을의 정취가 깊어가던 파리의 어느 귀족 저택. 이곳에서 사교계를 주름잡던 명사들이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로 한창 파리 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던 26세의 폴란드 출신 음악가 프레데리크 쇼팽도 있었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기도 하고, 참석자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그러던 쇼팽의 눈에 어느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였죠. 쇼팽이 그녀를 한참 바라본 건 아름다움에 끌렸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승마 바지를 입고 남장을 한 그녀의 모습이 무척 독특했기 때문입니다. 상드는 담배까지 피우며 남자들과 어울렸고, 종종 거친 말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 조르주는 필명이었는데, 이 또한 남자 이름이었죠. 쇼팽은 옆에 있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여자는 정말 질색이야. 진짜 여자이긴 한 걸까!” 예술사에 길이 남은 커플인 쇼팽과 상드의 첫 만남은 이렇게 비호감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19세기 유럽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세기의 커플이 될 수 있었을까요.
---「프레데리크 쇼팽, 사랑을 갈구했지만 허약하고 불완전했던 남자」중에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일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지휘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 10개의 교향곡을 비롯한 후기 낭만주의의 이정표와 같은 위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오페라단 소속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연주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진되는 직책입니다. 말러에겐 오페라 시즌 후 여름휴가를 알프스에서 보내면서 교향곡 작곡에 매진하는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엄격했고, 가혹하리만큼 자신을 몰아세웠습니다. 말러의 일 중독 성향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는 연습 때 단 1분도 지휘대를 비우는 법이 없는 엄격한 지휘자였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런 말러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죠. 그러던 어느 날 말러가 연습 도중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 1시간만 자리를 비우겠네.” 말러는 1시간 뒤 정확히 자리로 돌아왔죠. 연습이 끝난 뒤 한 단원이 어딜 다녀왔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왔다네.”
---「구스타프 말러, 지휘하다가 결혼식 올리고 돌아온 워커홀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