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결속감이 없는’ 동남아시아를 서로 연결하는 공통성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는 벼농사(稻作)를 짓는다는 사실이다. (중략) 이러한 도작 농업은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국가를 형성하는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공통성은 해역(海域)에 형성되었던, 동서양을 이어주는 교역망이다.
--- p.15
14세기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수많은 지역에서 페스트가 대유행했다. 중국 또는 중동이 발생원이었다고 추정되지만, 그것이 유럽까지 확산된 데는 몽골제국에 의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연결하는 교역이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페스트 역병 재난에 지구 한랭화까지 겹치는 통에, 14세기 후반에는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위기가 발생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사태로 이러한 지구 한랭화와 밀접히 결부될 가능성이 높은 사례는 14세기 중엽 쩐 왕조 베트남에서 빈발했던 기근과 그에 뒤따른 사회적 혼란상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동북 타이와 캄보디아 서북부 건조지대의 평원이 역사의 정식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정황도, 무엇인가 생태 환경의 변화와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p.76~77
중국의 명도 그러한 난관을 간신히 극복하고 1560년대 말경에는 해금 정책을 대폭적으로 완화했다. 중국인 상인의 동남아시아에로의 도항이 허용되었고, 포르투갈·스페인이 중국·일본에 교역 거점을 확보하는 등, 동중국해까지를 포괄한 아시아 해역에서의 ‘교역 시대’는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버마의 따웅우(Taungoo) 왕조와 같이, 교역을 통한 이익과 유럽 세력에게서 얻은 군사력을 결합시켜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던 사례도 나타났다. 이러한 ‘교역 시대’의 번영은 일본과 신대륙에서의 은 생산량이 감소하는 17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 p.91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친 시대의 동남아시아사는 ‘교역 시대’의 번영이 종언을 고한 뒤로, 식민지 지배하에 놓이기까지의 틈새 시기로 종래에는 별달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근년에 이르러 이 시대를 근현대를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여러 요소가 형성되었던 시대, 즉 ‘근세’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정착하는 추세라 하겠다. 이러한 재평가의 계기가 되었던 사태의 변화는 20세기 말 이후의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경제 발전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역사관, 곧 정체되어있던 아시아 사회의 ‘근대’는 산업혁명을 완수했던 서양을 통해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라는 생각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시아사에 있어서 전근대와 근대의 단절이 아닌, 연속성에 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 p.133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이렇듯 유럽과의 결합을 전제로 하면서도, 동남아시아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아시아 역내 교역 또한 확산이 되었다. 특히 설탕·쌀 같은, 이 시기 동남아시아에서 생산이 늘어난 소비재의 주요 수출 대상은 중국·일본·인도 등이 포함된 아시아 시장이었다. 이러한 역내 교역은 예를 들면 말레이반도가 고무·주석 등 공업 원료 생산지로 개발되었고, 수많은 중국인·인도인 노동자가 투입되면서, 베트남·싸얌·버마의 쌀이 이들 이민 노동자의 식량으로 공급된다는 식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형성되는 역내 국제 분업을 전제로 하면서 발전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근대는 이러한 역내 교역의 활성화라는, 전근대로부터의 연속성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연속성 또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포섭되었지만 여전히 전통적 역내 교역도 발전한다는 식의 구조가 아니라, 포섭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역내 교역이 발달했다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만 하겠다.
--- p.181
1929년에 일어난 세계 대공황은 상품 작물 수출에 의존해왔던 동남아시아 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편에서는 일차 산품 수출이 격감하여, 구매력이 저하됨에 따라서 저렴한 일본 제품에 대한 수요는 더한층 늘어났다. 프랑스가 높은 관세 장벽을 쌓았던 인도차이나를 제외하고서,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 총수입액에서 점하는 비율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25.4퍼센트, 영국령 말라야는 5.8퍼센트, 필리핀은 14.8퍼센트, 싸얌은 19.8퍼센트, 버마는 8.8퍼센트에 이르렀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유럽 종주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대미 수출에서 얻은 흑자로 대일 무역 적자를 메꾸는 방식의, 태평양을 둘러싼 새로운 순환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 p.215~216
현재의 말레이시아·싱가포르에 해당하는 지역의 경우에, 말레이시아·싱가포르라는 국가 형성에 직결되는 정치 운동이 본격화했던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이렇듯 운동이 늦어졌던 이유의 하나는, 이 지역이 해협식민지·말레이 연합주·말레이 비연합주·영국령 보르네오라는 서로 이질적인 행정 단위로 나누어졌고, 이들 네 지역을 포괄하는 운동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사정이 있었다. 또 다른 이유의 하나는 이 지역에는 중국계·인도계 이민이 다수 유입되어있었는데, 필리핀의 메스티소와는 달리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말라야 지역에 대한 귀속 의식이 대체로 희박했다는 사정을 들 수 있겠다.
--- p.243
이렇듯 일본이 마지못해 부여했던 ‘독립’에는 커다란 한계가 존재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어디까지나 일본 중심의 질서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지위는 일본이 처한 상황과 의사에 따라 결정될 뿐이었다. 일본이 부여했던 ‘독립’은 서구적인 ‘절대주권(絶代主權)’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일본의 ‘지도’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렇지만 형식상으로나마 ‘독립’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일본의 처지에서는 질곡으로 작용했고, 다양한 국면에서 일본은 대일 협력을 했던 동남아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존재했다.
--- p.287
인구가 많았던 쟈바는 일본군이 노무자를 중점적으로 징발하는 지역이 되었고, 그 수는 쟈바섬 밖으로 송출된 규모만도 30만 명에 이르렀으며, 멀리까지는 앞서 언급한 태면 철도 공사 현장에도 파견이 이루어졌다. ‘로무사romusa’라는 말은 일본 지배기의 어두운 기억의 흔적으로서 현재의 인도네시아어 단어로 정착해있는 것이다.
--- p.303
이렇듯 냉전 구조는 강대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였는데, 여기에 ‘편입된’ 동남아시아는 그러한 구조에의 적응을 그저 순순히 받아들이려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베트남전 당시에 미국과 전쟁을 치르던 베트남이 스스로 ‘사회주의 진영의 동남아시아 전초 기지’로서 자리매김했던 이유는 소련·중국이라는 사회주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베트남전이 격화되던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은 스스로를 ‘세계혁명의 초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이 베트남에 씌우고자 했던 ‘중국 주변부 혁명’이라는 식의 자리매김을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극복하려고 생각하면서부터 나타났던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 p.358
1990년대 전반에는 지역 협력의 기본 틀과 관련해, 자유무역과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이른바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해서 미국·오스트레일리아 등도 가세한 ‘아시아태평양’ 권역으로 결속할지, 아니면 ‘아시아적 가치’ 등과 같은 특성을 강조해 같은 ‘동아시아’로서 아시아 국가끼리의 결속을 다질 것인지의 두 갈래 방향이 제시되었다. 1990년에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가 제창했던 동아시아 경제 그룹〔EAEG, East Asian Economic Group〕은 후자의 입장을 대표하는 주장이었다.
--- p.430~431
코로나 사태가 던져준 가장 커다란 시련은 코로나 감염 방지 대책으로 각국이 어쩔 수 없이 국경의 벽을 높이는 조치를 하는 상황에서, 동남아시아가 전 세계는 물론 지역 내에서도 열려있는 동남아시아로서의 기존 노선을 굳건히 견지해갈 수 있는가에 있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코로나 사태 속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이동의 자유freedom of movement’를 이념으로 내세웠던 EU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역내 국가의 국경을 부득이 봉쇄했던 사실에서 전형적으로 보듯이, 국가에 의한 국경 관리 중요성의 부각, 코로나 사태에서의 국민 생활 보장, 고용 보장 및 경기 회복을 위한 재정 정책 등 국가 주도 경제 정책의 필요성, 의료복지 서비스의 지나친 시장화에 대한 반성 등에 근거해 국가의 역할이 새삼 중시되는 것이다.
--- p.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