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밤에 휘감아 도는 달빛을 가장 사랑하나니
좋은 비에 젖은 산의 마음을 바야흐로 보노라.
고요히 이 안에서 한가로이 나이 들어 가노라니
만종의 녹이 날개에 매인 깃털 하나보다 가벼워라.
次洪木齋韻 題寄石堂黃上舍二首 其二首
月華最愛淸宵? 山意方看好雨經
靜向此中閒送老 萬鍾系翅一毫輕
(≪가암 시집≫, 전익구 지음, 김승룡 최금자 옮김)
---「홍목재의 시에 차운해 석당 황 상사에게 부치다 2수 중 제2수」중에서
고전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1차적으로 규정을 받으며, 지금 이곳을 우리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로 전달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말한다. ‘고전’은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고정불변의 권위를 특별히 갖지는 않는다. 보편성을 갖는다고 여겨지는 텍스트들의 경우, 그것이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여전히 지금 여기의 문제를 논의하는 데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를테면 ≪논어≫가 고전일 수 있는 이유는 ‘공자의 ≪논어≫’라서가 아니라 지금 이곳을 위해 ≪논어≫ 속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며, ≪사기≫를 읽어야 한다는 것도 ‘사마천의 ≪사기≫’라서가 아니라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고전 목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제작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철저하게 ‘지역’에 복무한다. 지역은 지금 이곳의 다른 말로서,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되는 인간의 삶 자체를 뜻한다. ‘지역’을 특정 공간으로 한정해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지역’을 중심과 상대되는 주변으로 환치해서도 안 된다. 중심도 지역이요, 주변도 지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역’을 인간의 삶이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장소, 시간과 공간의 좌표에 의해 구분되는 인간적, 인문적 영역으로 이해한다. 곧 특정한 장소는 상상의 중심에 의해 주변화한 곳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의해 규정된 사람들의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에서 생산된 텍스트, 특히 한문 고전은 무엇이든 의미가 있다. 모두 특정 주체들의 이성과 감성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문 고전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 전통의 삶이 지혜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지역은 한글이 일상어가 된 근대 이후에도 한문 고전을 생산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지점도 주목한다. 지역의 한문 고전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삶을 보여 주는 텍스트였던 것이다. 우리가 ‘지역’과 ‘고전’을 하나로 붙이고, 지역의 모든 인문적, 인간적 생산물을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다른 말로 ‘지역’을 주목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한문 고전을 텍스트로 읽고자 하는 데에는 더욱 중요한 사고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태도다. 살았던 것/살아온 것/살아갈 것은 모두 존중받을 필요가 있으며, 이들에 의해서 생성된/생성되고 있는/생성될 텍스트는 모두 평등한 가치를 부여받아야 한다. 학연이든, 지연이든, 권력이든, 소용(所用)이든, 그 어떤 이유로도 생명(우리는 문헌도 하나의 생명으로 간주한다)에 대해 차별할 근거는 없다. ‘지역’의 편언척자(片言隻字)조차도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기≫를 짓기 위해 산천을 거듭 다녔던 사마천의 마음과, 조선 팔도를 수차례 걸어 다니며 작은 구릉과 갈래 길도 세세히 살폈던 김정호의 생각을 떠올려 본다.
이제, 우리는 ‘지역’에서 생성된 텍스트에 생명을 불어넣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그동안 이들은 ‘생명 없는 생명체’였으며, ‘고립된 외딴섬’이었다. 비록 미약하지만 이후로 하나씩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될 수 있도록 소중하게 발굴하고 겸손하게 살피고 애정으로 복원해 21세기 한국 사회의 지적 자산으로 확보하고자 한다. 그 방법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하나씩 ‘고전’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들이 우리의 곁에 존재했건만 아직 손대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이후 복원된 생명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훌륭한 인간적, 인문적 세계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많은 분들의 동참을 기다린다.
2022년 8월
지역 고전학 총서 기획 위원회
---「<지역 고전학 총서>를 기획하면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