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바다는 육지를 합치고 나눈다. 그러나 지중해 지역에서 중요한 것은 바다로 인해 생기는 도전의 규모이며, 너른 대양에 비해 한계 내에서의 이동이 비교적 손쉽다는 점이다. 이동의 편의는 추가적인 이점이 있다. 지중해의 역사는 공존의 역사다. 상업·문화·종교·정치적으로 말이다. 또한 그들의 때로 강력한 민족적·경제적(그리고 종교적) 차이를 자각하고 있는 이웃들 사이의 대결의 역사이기도 하다. 생태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역사가들이 가장 중점을 두는 생태 환경 문제는 무엇보다도 그곳이 거주하는 인간에게 지운 생활 조건이며, 그다음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바꾸어가는 방식이다. 지중해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은 그 표면에서 일어나는 상업·문화·종교적 상호작용을 통해 표현된 지중해의 인간 역사를 쓰는 것이다.
--- p.41~42, 「서론: 지중해란 무엇인가」 중에서
여기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시기는 첫 번째 상업 제국들이 형성된 시기다. 특히 미케네와 페니키아 교역망이다. 이들이 처음으로 지중해를 장악했고 이에 따라 그 문화적 외양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중해에서 항해가 시작된 것은 청동기시대가 시작되기 훨씬 전이었다. 밀로스에서 나는 흑요석 조각이 그리스 본토 아르골리스 남부 지역에서 발견됐는데, 이는 서기전 7000년 무렵의 구석기시대에도 지중해 항해 능력이 어느 정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가장 이른 것이다.
--- p.87~88, 「2. 교역 제국들의 시작」 중에서
페니키아인들의 서방 진출은 몇 가지 이유로 대단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우선 그리스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에트루리아인, 이탈리아 민족들, 리비아인, 이베리아인들에게도 페니키아인은 강력한 교역 활동의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모형, 사회 제도, 생활방식 전체의 확산에 기여했다. 사치품의 확산은 복잡한 여러 통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에서 오는 원료(특히 금속)의 교환과 긴밀하게 이어진 통로다. (…) 그들이 수송한 사치품은 이데올로기가 전파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방 모델을 바탕으로 한 교류의 구조 자체는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 원주민들을 만나는 지역에서 충실하게 재현됐고, 동방 문화가 확산되는 강력한 원천이 됐다.
--- p.134~135, 「3. 해로 전쟁」 중에서
로마인들이 전체 바다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마레마그눔(Mare Magnum, ‘거대한 바다’), 마레인테르눔(Mare Internum, ‘안쪽 바다’), 마레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이라고 했다. 뒤의 두 표현이 더욱 흥미롭다. 지중해는 정말로 로마에 팽창과 제국을 위한 내부의 통로를 선사했다. 관리, 군인, 이주자, 노예, 수공업자, 순회 전도자들이 사용한 길이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다. 상인들에 못지않았다. 바다 주위의 모든 땅들이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지중해는 내부의 호수, ‘우리 바다’가 됐다. 그리스인들도 이전에 분명히 비슷한 말을 썼다. 헤 탈라사 헤 카트 헤마스(he thalassa he kath’ hemas), 즉 ‘우리가 넘는 바다’ 또는 ‘우리 바다’다. 그러나 엄격하게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썼다. 초기 제국 시대의 로마인에게 그것은 정말로 전체로서의 마레노스트룸, ‘우리 바다’였다. 흑해와 홍해는 부속물이었고, 심지어 지브롤터해협 너머도 그랬다. 이렇게 전체 지중해를 하나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지배한 것은(그리고 사용한 것은) 이전에도 전혀 없었고, 이후에도(똑같은 방식으로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 p.173~174, 「4. ‘우리 바다’의 형성」 중에서
중세의 마지막 500년 동안 지중해는 많은 중대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는 그 연안에서 정치적 권위를 행사한 권력 추이의 변화였다. 서방 세력이 확장되면서 이에 맞추어 아랍 국가들의 이슬람 권력이 쇠락했고, 오스만이 정복한 지역에서 튀르크계 권력이 떠올랐다. 그 정점은 1453년 튀르크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일이었다. 두 번째는 이른바 ‘중세 항해 혁명’이었다. 이 용어는 각기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연구한 주요 역사가인 프레더릭 레인과 로베르토 로페스가 모두 사용했다. 이 시기는 교역이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확대됐고, 기술 진보 수단(19세기까지 이 시기의 것을 능가하지 못했다)도 제공됐다. 고정적으로 이용된 해상로가 지중해를 이리저리 가로질렀다. 그 길들은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선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나중에는 한 기독교도 세력과 다른 기독교도 세력 사이에서였다. 더구나 지중해에 면한 지역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는 누가 바다의 패권을 차지하느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육상의 강자가 반드시 해상의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 p.245, 「6. 기독교도의 지중해」 중에서
이 결정적인 전투는 1798년의 전략적인 상황을 바꾸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좌초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역사를 바꾸었다. 1798년부터 1945년 이후 영국 해군력이 쇠퇴하기까지 지중해는 영국의 호수였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의 해군력이 지배하는 바다였다. 이것은 영국이라는 제국이 지중해와 그 해안에서 힘을 발휘한 전제조건이었다. 직접 지배(몰타, 이오니아제도, 키프로스, 이집트, 팔레스타인 등)를 하기도 했고, 간접적으로 지배하기도 했다. 그것은 또한 이 지역에서 영국 경제력의 전제조건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을까? 왜 1798년에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이집트 앞바다의 통제권을 놓고 다투었을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100년 전으로 돌아가 지중해가 국제무대에서 아주 새로운 위치를 차지하게 됐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곳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슬람 세력의 전진은 중단됐고, 베네치아는 쇠락했으며, 교역과 문화 교류의 핵심 통로는 더 이상 이 푸른 바다를 통과하거나 그 주변을 지나지 않았다.
--- p.326, 「8. 유럽 열강의 전쟁터가 된 지중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