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장면이었다. 온갖 인종의 사람들이 같은 줄에 함께 서 있었다. 그들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문직 종사자와 가사도우미, 청소부와 집주인이 투표소까지 꾸물꾸물 서서히 나아가는 줄에 섞여 서 있었다. 재난이 될 법했던 상황은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그 줄은 남아공의 새롭고 독특한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렇게 뻐겼다. “나는 투표하려고 두 시간이나 줄 서 있었다.” “난 네 시간 기다렸어!”
--- p.29
“과거는 과거로 흘려보내자”라는 말 한마디로 과거를 정말 지나간 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없다. 우리가 겪은 경험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한다. 정말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과거는 그냥 사라져 버리거나 얌전히 누워 있기는커녕 당혹스럽고 끈질기게 되돌아와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가 그 야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한, 그놈은 어김없이 되돌아와 우리를 볼모로 사로잡는다.
남아공의 영국인들과 아프리카너들이 이 문제의 완벽한 사례이다. 20세기 초 보어전쟁 기간에 영국인들은 보어인 여성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보어인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동자들까지 포함해 20만 명 이상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강제수용소는 이후 히틀러가 아리아인의 혈통적 순수성에 미친 듯이 집착하여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의 대명사가 되어 그에 합당한 오명을 얻게 되지만, 당시만 해도 영국인들의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그곳에 수용된 이들 중 5만여 명이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전쟁이 끝난 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쪽도 거론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당시의 상처가 아물고 영국인과 아프리카너는 행복하게 어울려 사는 듯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의 우호관계는 상당히 불안정하고 어색하며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1998년 나는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타고 취리히에서 출발했다. 젊은 아프리카너 한 사람이 동행했는데,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당한 끔찍한 일들에 관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또,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보어전쟁을 다시 벌일 각오가 솟구친다고 다소 흥분해서 말했다.
--- pp.55~56
이번 장을 마치기에 앞서, 사면이라는 제3의 길은 응구니족 언어로 ‘우분투’(Ubuntu), 소토족 언어로는 ‘보토’(botho)라고 부르는 아프리카 세계관의 핵심 특성과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떻게 해서 그토록 많은 남아공 사람들이 징벌을 요구하는 대신 용서를 선택하고, 복수를 꾀하기보다 아량을 베풀며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을까?
‘우분투’는 서구 언어로 번역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것은 인간됨의 본질을 뜻한다. “유, 우 노분투”(Yu, u nobuntu, 이 봐, 아무개가 우분투가 있어)라는 말은 최고의 찬사다. 관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자비롭다는 뜻이다.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내 인간성은 당신의 인간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여러 사람과 한데 묶여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다. “나는 속하고 참여하고 나누기 때문에 인간이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욕을 받거나 위축되거나, 고문이나 압제를 당하거나, 실제보다 못한 취급을 당할 때 그 자기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화, 친절함, 공동체는 모두 가치 있는 선이지만, 사회적 조화는 우리에게 숨뭄 보눔(summum bonum), 즉 ‘최고선’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이 선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모든 것을 역병처럼 피해야 한다. 분노, 적개심, 복수심, 심지어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공은 이 선을 좀먹는다. 용서는 그저 이타심만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된다. 상대방을 비인간화하려는 것은 틀림없이 나도 비인간화한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회복할 힘을 얻고,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려는 모든 것을 이겨 내며 여전히 인간답게 살 수 있다.
--- pp.60~61
정의의 개념을 징벌을 주된 목표로 하는 응보의 정의로만 본다면, 남아공에서는 정의가 행해지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응보의 정의에서 피해 당사자는 국가가 된다. 하지만 비인격적 조직인 국가는 실제 피해자는커녕 범죄자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응보의 정의 외에 또 다른 정의가 있다. 회복적 정의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법제도의 특징이었다. 회복적 정의의 주된 관심사는 징벌이나 처벌이 아니다. 우분투의 정신에 따른 불화의 치유, 불균형의 시정, 깨진 관계의 회복, 희생자와 범죄자 모두의 복권 추구이다. 범죄자도 자신이 상처 입힌 공동체에 재통합될 기회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범죄를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로, 그 결과를 관계의 파괴로 보는, 훨씬 더 인간적인 접근법이다. 따라서 정의, 즉 회복적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유와 용서, 화해를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 pp.86~87
우리는 대개 자신의 약한 부분과 악함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와 치유의 과정이 성공적인 결과에 이르려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곤란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부부가 말다툼을 했는데 잘못한 쪽이 잘못을 인정하여 불화의 원인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리 남편이 귀가할 때 꽃다발을 사 들고 오고 부부가 아무 일 없는 척해도, 그들은 언젠가 갑자기 충격적인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과거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사람의 차이점을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괜히 건드렸다가 심각한 싸움으로 번질까 봐 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처럼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를 외치며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과 같다. 갈등의 골을 애써 숨기고 애초에 불화하게 된 원인을 해결하지 않았다. 남편이 사 들고 온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 상처는 곪게 마련이다. 언젠가 두 사람의 갈등은 크게 폭발할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값싸게 화해를 얻으려 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진정한 화해는 싸구려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얻기 위해 독생자의 죽음을 값으로 치르셔야 했다.
--- p.359
피해자가 가해자의 사과를 받고 마음이 움직여 그를 용서해 주면 좋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위원회 사람들은 수많은 피해자들이 보여 준 비범한 아량에 끊임없이 놀랐다. 물론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용서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용서는 싸구려가 아니고 쉽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우리는 대단히 감동적이고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 장면들을 훨씬 자주 보았다.
용서하라는 말은 잊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그런 잔학 행위가 다시 벌어지지 않게 막을 수 있다. 용서는 자신이 당한 일을 묵과하는 것이 아니다. 벌어진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 속에 숨어 우리의 전 존재에 해를 끼칠지 모를 위험한 독침을 빼내는 일이다. 가해자를 이해하고 그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의 입장이 되어 그가 어떤 압력과 영향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게 되었을지 파악하려 애쓰는 일이다.
--- pp.360~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