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는 늦은 3월에 잎사귀가 나면서 작은 혹 같은 것이 생기는데(‘타퀴시’라고 하는), 이것이 생기면 약 6주 뒤인 5월 초에 진짜 무화과가 열릴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잎사귀만 있고 이 혹이 없으면(“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이 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며 사실상 죽은 나무임을 알려 주는 확실한 증표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나무에 내리신 저주는 그저 필연적인 일을 확인해 주신 것일 뿐이다. 절실한 배고픔을 채우려 열매를 찾았는데 열매가 없자 심히 실망해서 건강한 무화과나무에 멋대로 저주를 내리셨다는 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행동을 현실에 실행된 비유로 보아야 한다.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메시아의 존재와 그분의 메시지 앞에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대체적으로 보인 무반응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그 처절한 멸망을 예견하신 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눅 19:41-44).
---「1부 20장 “예수는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왜 저주하셨는가?”(막 11:12-14, 20-25)」중에서
이 시기에 마리아의 임신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첫 삼 개월은 지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마리아는 잉태할 것을 알게 된 후(눅 1:31, 35) 친척 엘리사벳 집에 가서 “석 달쯤 함께 있다가”(눅 1:56) 나사렛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한편 요셉이 만삭의 여인을 데리고 긴 여정에 나서는 모험을 감행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팔레스타인 북쪽의 나사렛에서 남쪽의 베들레헴까지는 약 145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였고, 성인 걸음으로 적어도 6일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누가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마리아가 임신 중이었고(“이미 잉태하였더라”) 베들레헴에 “있을 그 때에” 출산을 했다는 것뿐이다(눅 2:5-6). 5절의 분사(우세ous?, “(잉태)하였더라”)는 단순히 형용사적 표현일 것이다. “(마리아가) 아기를 낳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분사는 원인을 가리키는 말, 즉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간 것은 “[마리아가] 잉태하였기 때문”임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요셉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함으로써 미가 5:2이 성취되도록 배려한 것이다. 세 번째 해석안은 이 분사가 양보적 의미의 분사로서, “[마리아가] 잉태했음에도/잉태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뜻이다.
마리아가 임신 중기에 접어들었든 후기에 접어들었든, 6-7일이 걸리는 여정은 몹시 벅찼을 것이 틀림없다. 여성용 안장에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아서든 혹은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든, 요셉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마리아가 나귀에 올라타 흔들흔들 길을 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길은 심히 울퉁불퉁해, 임신 중의 마리아에게는 몹시 불편한 요동이 전해졌을 것이다. 이 힘들고 험한 여정을 마리아가 견뎌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가 안전하게 태어날 것을 보장하는 말씀을 각각 들었으므로(마 1:21; 눅 1:31, 35) 이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을 것이다.
---「1부 22장 “마리아의 힘겨운 여정”(눅 2:1-6)」중에서
예수께서 질문하실 때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17)라고 대답했다. 이 세 절에서 “사랑”을 뜻하는 두 가지 동사(아가파오agapa?와 필레오phile?)가 쓰였다는 사실에는 별 중요성이 없다. (1) 이 동사들은 (예를 들어)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처럼(3:35와 5:20) 이 네 번째 복음서 다른 구절에서 서로 바뀌어 사용될 수 있으며 (2) 지금 이 구절에는 이것 말고도 문체상의 다른 변형들(‘양을 치다’, ‘양’, ‘알다’를 뜻하는 단어들)이 있으며, 이는 요한 문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매번 대답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은혜롭게도 그에게 다시 사명을 주시는데, 이번에는 목자로서의 사명이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 여기서 두 가지 동사(보스코bosk?, “돌보다”, “먹이다”; 포이마이노poimain?, “돌보다”, “[양을] 보살피다”)가 쓰인 것을 보면 목자는 양을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앞서 베드로는 사람을 취하라는(to fish) 사명을 받았었다(눅 5:10). 이 복음 전도자는 이제 낚싯바늘(hook)에다 목자의 지팡이(crook)를 갖게 되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낚시와 지팡이로”(by hook and by crook, 오늘날 이 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는 뜻의 관용어로 쓰인다. ― 옮긴이) 이중의 역할을 이행했다.
---「1부 49장 “죄지은 지도자가 교회의 공적 직분에 다시 임명될 수 있는가?”(요 21:15-17)」중에서
셋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잘못인 이유는, 죽음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교제가 깊어지도록 즉각 안내하기 때문이다(고후 5:8; 빌 1:23). 죽은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죽음으로 신자는 잠시 주님과 따로 있는 것을 종료하고 믿음의 순례를 끝낸다(고후 5:6-8). 반면, 죽음을 친구로 반갑게 포용해서도 안 된다.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일인 육체의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의 한 증거이기 때문이다(롬 5:12; 6:23). 우리가 죽음을 환영해서는 안 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죽음이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체적 모습을 주셨는데 죽음은 인간에게서 이 모습을 빼앗아 가고 인류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앗아 간다. 죽음으로 인간은 이 땅에서 사는 삶이 주는 안전에서 철저히 쫓겨난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양가적(兩價的)이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환영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죽음이 안겨 주는 것, 즉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직접적 임재 안에서 그분과 누리는 풍성한 교통은 열렬히 환영해야 한다.
---「2부 17장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고전 15:26, 54-55; 고후 5:8)」중에서
이 가시는 모종의 육체적 질병이었다고 보는 것이 앞에서 설명한 “가시”의 일곱 가지 특징과 가장 쉽게 조화된다. 고린도전서 5:5을 보면(참조. 고전 11:30; 딤전 1:20) 사탄은 징계 성격의 질병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는 대리자로 보인다(참조. 욥 2:1-10). 확실히, 자꾸 재발해서 고통을 주는 질병은 “사탄의 사자”로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울을 사망의 그늘 안에 둘 수도 있었고(참조. 고후 1:8-9),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바울을 멸시하게 만들거나(참조. 갈 4:13-14) 바울의 전도 여행 계획을 좌절시킴으로써(참조. 살전 2:18) 복음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사탄의 온갖 간계 이면에서 부단히 악에서 선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섭리를 간파할 수 있었다. 바울이 만약 자신의 “가시”가 무엇인지 밝혔다면, 그 특정한 질병이 없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후서 12:8-10에 요약된 것과 같은 바울의 체험을 자기 상황과는 별 상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갖가지 “가시”를 지닌 수많은 신자들은 바울의 체험을 자신의 체험 삼아 그 가시를 견뎌 내며 위로받아 왔다.
---「2부 31장 “육체에 박힌 가시”(고후 12:7)」중에서
여기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두 번째인 “오직 믿음으로”다. 무엇보다 바울은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 말고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롬 3:28)? 그런데 또 한편으로 야고보는 “이로 보건대 사람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라고 하지 않는가(약 2:24)? 중대한 문제에 관한 이 두 성경 기자의 모순되어 보이는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럴 듯한 해법이 두 가지 방향에 있다. 첫째, 이 두 기자는 서로 다른 상황에 관해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 받는 것과 무관하다고 잘못 믿고 있는 일부 그리스도인에게 답변하고 있다. 이들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했을 수 있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2:17)이라고 주장하는 말이 이해가 간다. 반면 바울은 동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나 안식일 준수 같은 종교적 관행을 따라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게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갈 5:4). 따라서 바울은 “율법에서 나오는 나 자신의 의”를 배격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받아들인다(빌 3:9).
---「2부 56장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약 2:24)」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