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는 정원 문을 나섰다. 밖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커다란 개 한 마리가 그림자처럼 앞을 스쳐 지나갔다. 길은 하얗게 빛나고 움푹 들어간 아래쪽에는 작은 집들이 짙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소란스러운 오후를 보낸 뒤인지라 더욱 조용해 보였다. 이제 이 언덕을 내려가 한 남자가 죽어 누워 있는 어느 집으로 가려 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왜 느끼지 못할까?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조금 전의 입맞춤, 이야기 소리, 스푼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짓밟힌 잔디 냄새 등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무엇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이상하기도 하다. 저물어 가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녀는 오직 ‘그래, 정말 더할 나위 없는 파티였어.’라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 p.34
거기에는 한 젊은이가 잠들어 누워 있었다…… 너무나 곤히 깊이 잠들어서 그들 두 사람과는 아주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 어쩌면 이다지도 평화롭기 그지없이 멀리 있는 걸까.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잠을 깨워서는 안 되겠다. 머리는 베개에 묻히고 눈은 감겨 있었다. 감긴 눈꺼풀 밑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꿈에 취해 있었다. 파티고, 바구니고, 레이스 달린 드레스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그는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자기들이 웃고 있을 때, 악단이 연주하고 있을 때, 이 놀라운 기적이 골목길에 일어난 것이다. 행복하고…… 행복한…… 나무랄 것이 없다고, 잠든 얼굴은 말하고 있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만족스럽다.
--- pp.37~38
꽃송이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꽃잎이었다. 옅은 노랑 꽃잎 하나하나가 공들여 만든 작품처럼 빛을 내고 있다. 한가운데에 작은 혀 같은 꽃술이 있는 모양새가 꽃 전체가 작은 종처럼 보이게 했다. 꽃을 돌려보면 바깥쪽은 짙은 청동색이었다. 그러나 꽃은 피자마자 곧 떨어져 버린다.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윗옷에서 꽃을 털어 낸다. 잘 떨어지지 않는 작은 것들은 털어도 머리카락에 붙는다. 도대체 이럴 거면 애초에 꽃은 왜 피는 것일까? 누가 일부러 고생스럽게, 아니면 기뻐하면서까지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덧없이, 덧없이 가 버릴 것을? 참 이상도 했다.
--- p.83
이런 꽃들을 여유롭게 바라볼 시간이 있다면,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까지 천천히 알아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하지만 멈춰 서서 꽃잎을 펼쳐 보고 이파리 뒷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인생’이라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삼켜 버린다.
--- p.84
그렇다고는 해도, 병적으로 되거나 추억이나 그런 것 때문에 비탄에 빠지지는 않아도, 어쩐지 인생에는 무슨 슬픔이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요.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슬픔이라거나, 질병, 가난, 죽음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 다른 무엇이에요. 가슴 깊이, 가슴 깊이 있어서 존재의 한 부분이고 마치 숨을 쉬는 것과도 같아요. 아무리 피곤하도록 일을 하고 몸이 지쳐도 잠깐 멈추기만 하면 그것이 거기, 거기 있음을 알게 되지요.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까, 생각도 해보지요. 그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지만 그 아름답고 즐거운 노랫소리에서 내가 들은 게 이것- 슬픔 -아, 뭐라고 해야 할까? -이라는 게 놀랍지 않아요?
--- pp.167~168
로사벨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옇게 된 창문에 불빛이 비치자 거리 풍경은 우윳빛과 은빛으로 변해 창문으로 보이는 보석가게는 동화 속 궁전 같았다. 로사벨의 발은 젖어있었다. 치맛자락에는 기름 섞인 진흙이 시커멓게 묻어 있으리라. 버스 안은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뿜어낸 뜨거운 열기로 꽉 찬 듯했다. 모두가 똑같은 표정으로 앉아 앞을 보며 하나같이 같은 광고를 쳐다보고 있었다.
--- p.357
햇살이 푸르른 금빛 선을 그리면서 역사驛舍의 유리 천장을 지나 승강장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 남자아이가 앵초꽃을 담은 커다란 바구니를 든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나른하면서도 한편으로 들떠 보였다. 특히 여자들이 그랬다. 바야흐로 1년 중 가장 설레는 계절, 봄으로 접어드는 이 따뜻하고 달콤하고 아름다운 날이 런던에서도 막을 연 것이다. 이 계절에는 색깔이란 색깔은 모두 반짝반짝 빛나고, 목소리에는 하나같이 새로운 음조가 깃든다. 느릿느릿 흐르던 혈액을 힘차게 밀어내는 진정 살아 있는 심장을 지닌 이 도시 사람들이, 진정 살아 있는 몸을 옷으로 감싼 채 거리를 걸었다.
--- p.409
제이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너무나 가볍고, 너무나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그녀의 말들이 공기 중에 맴돌다 눈이 내리듯 그의 가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불길이 붉게 변했다. 불길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고 방은 점점 싸늘해졌다. 그의 팔 위로 추위가 엄습했다. 방은 크고 거대하고 빛이 났다. 방이 그의 세계를 가득 채웠다. 커다란 눈 먼 침대가 있고 그의 외투는 어느 머리 없는 남자가 기도하듯이 침대 위에 걸쳐 있다. 다시 기차에 던져지거나 배에 실리거나 해서 어딘가로 옮겨질 짐들이 보인다.
--- pp.539~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