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네 사람이 친구의 중풍병을 치유받으려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집으로 친구를 데려왔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막 2:4). 그런데 예수님은 환자의 병부터 고쳐 주시지 않고 갑자기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고, 모든 사람은 충격에 빠졌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절).
잠시 당신이 그 중풍병자라고 상상해 보라. “감사합니다만, 저한테 더 시급히 필요한 게 빤히 보이지 않나요?” 아마 그런 기분이 들었을 테고, 당신이 당찬 성격이라면 그 말을 입 밖에 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아니,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셨을 것이다. 그때 중풍병자의 심정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병석을 털고 일어나 다시 걸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겁니다. 평생 불평하지 않고, 만족하며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네 주위의 이 모든 사람을 둘러봐라. 그들은 다 걸을 수 있다. 그런데 마음 가득히 만족하더냐? 다 행복하게 살더냐? 내가 병만 고쳐 준다면 너는 한동안 뛸 듯이 기쁘겠지만, 얼마 못 가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말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죄 사함”이었다. 용서는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또 우리 자신에게서 소외되어 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 네 본성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나다. 나만이 온전한 사랑, 새로운 정체성, 끝없는 위안과 소망과 영광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두에 들어서려면 용서를 알아야 한다.” 이제 용서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
--- pp.23~25
용서하려면 첫째, 죄를 그저 양해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받아 마땅한 죄로 사실대로 지적해야 한다. 둘째, 가해자를 자신과 다른 악한 존재로 볼 게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그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겨야 한다.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야 한다. 셋째, 복수를 꾀하고 되갚을 게 아니라 빚을 스스로 부담해 가해자를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끝으로, 관계를 영영 끊을 게 아니라 화해에 힘써야 한다. 이 네 가지 행동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빠뜨리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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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사회 즉 깨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우리는 용서를 배워야 한다. 아렌트와 킹과 투투로 대변되던 시절에는 역사상 끔찍한 구조적 압제 앞에서 진실과 정의는 물론 사랑과 용서로도 대응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큰 용서’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절실히 배워야 하는 작은 용서가 흐려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냉대와 실망과 본의 아닌 상처에 파묻혀 살아간다. 사람들이 날마다 고의로 우리에게 입히는 온갖 자잘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말없이 용서하고 언제 문제를 거론할 것인지를 배우고,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때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 용서 없이는 사랑할 수 없듯이, 용서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다.
--- pp.74~75
히브리서 12장 15~16절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 살피라”라는 말씀이 있다. 실감 나는 은유다. 밭모퉁이의 나무를 없애고 싶어서 나무를 베고 밑동까지 파낸다 하자. 이제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얼마 후 밭모퉁이에 가 보면 뜻밖에도 어린나무가 다시 돋아나 있다. 왜일까? 땅속에 남아 있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싹을 틔운 것이다.
이 말씀은 가해자를 향한 당신의 분노를 시인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는 늘 처음에는 이렇게 반응한다. “아, 저는 괜찮아요. 화난 게 아닙니다. 약간 불쾌한 정도지요.”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유지하려고 쓴 뿌리, 즉 악감정을 부인하는 것이다. “내가 용서는 했지만 잊지는 않으리라.” 이 말은 당신이 적극적으로 복수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원한에 차서 상대의 몰락을 바란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피해자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라고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는 “……되지 않게 살피라”예의 주시하라는 뜻의 관용구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보다 원한이 많고, 용서에 인색하며, 다른 사람에게 입은 상처에 쉽게 지배당하는 존재임을 우리 스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숨은 뿌리는 은밀하게 활동한다. 주변까지 넓고 깊게 땅을 파고 들추어내지 않는 한 절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다 그것이 다시 싹을 틔우면 어느새 우리는 잔인한 말이나 행동을 해 놓고는 자신도 충격에 빠져 버린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모든 도움에 힘입어 의지적으로 철저히 용서하지 않는 한, 히브리서 말씀처럼 분노가 당신을 “더럽게” 할 것이다.
--- pp.247~248
만화가가 누군가를 우스꽝스러워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캐리커처를 그릴 수 있다. 얼굴에서 좀 특이하거나 약간 멋없는 부분을 두드러지게 과장하면 사람이 실없어 보인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었을 때 마음속으로 하는 일이 바로 그것과 같다. 당신에게 잘못한 일 하나만 가지고 상대를 일차원적으로 생각한다. 누가 당신에게 거짓말하면 당신은 “그 사람이 원래 거짓말쟁이니까 거짓말이 나온 거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당신이 한 거짓말이 들통나서 누가 그 이유를 물으면 그때는 “거짓말이긴 한데, 복잡한사정이 있거든. 본의 아니게”라고 변명한다.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근본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자신을 늘 삼차원의 복잡한 인간으로 대우하면서 당신에게 거짓말한 사람을 볼 때는 다짜고짜 일차원의 악당으로 간주한다.
당신에게 거짓말한 그 사람은 분노한 당신의 머릿속에서 거짓말 자체로 전락했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한다. 상대의 잘못된 행동을 곱씹으면서 “나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렇게 상대와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려는 충동은 마음으로 가해자를 밀어내는 본능적인 방식이다. 가해자를 낮추면 은근히 승리의 쾌감이 들지만 그 끝은 독선이며, 마음속의 독선은 언제나 치명적이다.…(중략)… 원한을 품고 있으면 내가 가해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원한을 버리기가 더 어려워진다. 자신도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보지 못하면 그 원한이 당신을 비뚤어지게 하고 더럽힌다.…(중략)… 용서하려면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겨야 한다. 볼프의 말처럼 자신도 죄인이고 가해자도 인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용서의 첫걸음이다.
--- pp.250~252
때로 사람들은 용서하면 가해자와 이전 수준의 관계를 즉시 재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가 참으로 달라졌다는 증거를 보여 주기 전까지는 그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상습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곧바로 다시 신뢰한다면 사실상 그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교회는 성추행 가해자를 신뢰와 권위의 자리에 전격 복직시키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것까지도 용서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자동으로 복직시키지 않으시고, 널리 알려진 대로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치셨다.요 21장 신뢰는 회복되어야 하지만, 회복 속도는 가해자가 징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 p.258
화해에 대한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말씀은 이것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이것은 신자가 신자에게 죄를 지어 관계가 깨진 경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수님은 두 그리스도인의 어그러진 관계가 양측만의 일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문제이며, 따라서 관계를 회복하는 데 공동체의 자원과 개입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첫째,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혼자서 가라고 말씀하신다. 처음부터 제삼자를 개입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시대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나는 그분의 말씀 그대로 지금도 이 일은 직접 “가서” 하는 게 좋다고 본다. 즉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는 전화나 글이나 이메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러 연구로 보나 비공식 증거로 보나 젊은 ‘디지털 원주민’ 세대는 가라는 말에 잔뜩 겁을 먹는다. 문자나 이메일에 답하지 않고 그냥 ‘잠수를 타는’ 편이 훨씬 쉽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고 거기에 더해 관계 회복까지 시도하는 것은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다. 진실과 사랑, 정의와 자비를 균형 있게 전달하려면 몸짓 언어, 말투, 얼굴 표정, 어휘, 감정 등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상대에게 가서 마주 보며 말하라. 물론 그 전에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상대에게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한 불만을 퍼뜨리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가되 상대를 난처하게 하는 방식으로 가지는 말라.
--- pp.280~281
어떻게 진노하셔야 할지를 우리가 하나님께 일러 드릴 게 아니라, 그분이 뜻하신 때에 뜻하신 대상에게 진노를 내리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친히 정의의 형벌을 받으신다. 옛 KJV 성경에는 19절이 “복수는 내 것이니”로 옮겨져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임했어야 할 진노가 그분께 임했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받아야 할 복수가 말 그대로 그분의 것이 되었다.
용서하는 마음을 원하는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마음, 우월감을 품지 않는 마음, 자신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는 마음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받아야 할 복수를 대신 받으신 예수님을 보라. 복수는 예수님의 것이다! 그분이 받으셨다.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가 알려 주는 영원한 교훈은 이것이다. 종인 우리가 작은 왕과 재판관으로 행세하기를 그만두려면, 우리를 위해 자원해서 종이 되신 왕을 바라보는 길밖에 없다. 사랑을 노력으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을 베풀려면 먼저 사랑이신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을 배우려면 먼저 사랑을 경험한 뒤 그대로 전달하면 된다. 인내심을 기르려면 가장 값비싼 인내로 당신을 구원하시고 운명의 순간에까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며 당신을 용서하신 그분을 봐야만 한다. 그럴 때 당신은 변화될 수 있고, 실제로 변화된다.
--- pp.293~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