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모아진 글은 작가 토마스 만이 예술 행복감과 예술 인식의 측면에서 음악가이자 연극쟁이인(그의 연극 이론을 토마스 만은 비난하는데) 바그너의 덕을 입었다는 증언들이며, 또한 그가 이 ‘마법사’를 향해 일종의 예술적·도덕적 의무로 여겨 유지하는 비판적 거리두기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서문」중에서
그렇게 해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 우리 시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 현대음악을 처음으로 만났다. 내가 절대로 물리는 법 없이 체험하여 알고자 하는 이 거대한 문제적 작품, 영리하고 속 깊은,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교활한 마법, 극장 바깥에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극장에 묶인, 무대의 즉흥곡을 말이다. 이 음악, 오로지 이것만이 나를 평생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연극 무대에 관한 시론」중에서
리하르트 바그너 덕분에 예술의 즐거움과 예술 인식을 얻은 것을 나는 절대 잊을 수 없지만, 정신에서는 그를 멀리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 정산」중에서
독일인들에게 ‘괴테냐 아니면 바그너냐’를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둘이 함께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그들이 ‘바그너’라고 말할까봐 걱정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닌가요? 어쩌면 모든 독일인이 가슴 밑바닥에서 괴테가, 폭발하는 재능과 지저분한 성격의 작센 출신 코맹맹이 난쟁이와는 비할 바 없이 존경할 만한, 믿을 만한 지도자이자 민족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아는 걸까요? 의문입니다.
---「율리우스 바프에게」중에서
바그너처럼 우리의 생산 본능을 자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간적·문학적 관심은 괴테를 향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바그너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졌어요. 처음에 그리고 계속해서 바그너 작품을 체험한 흔적이 분명 내 생산품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죠. 〈로엔그린〉을 맨 먼저 알았고, 이 작품을 수없이 보아서 지금은 그 텍스트와 음악을 거의 외우다시피 합니다.
---「어느 오페라 연출가에게」중에서
괴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종種에서 완전한 것은 모두 자신의 종을 넘어 무언가 다른 것, 비할 바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이팅게일은 많은 소리를 낼 때 그냥 한 마리 새일 뿐이다가 갑자기 새라는 종을 넘어서면서, 모든 새에게 노래가 대체 무엇인지를 알려 주려는 것처럼 노래한다.” 바로 이와 똑같이 바그너는 오페라를, 입센은 시민극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예술을 무언가 다른 것, 비할 바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괴테의 나이팅게일 예에 나타나는 저 머뭇거림과 퇴행도 그들에게서 드러난다. 이따금, 그것도 이미 높은 곳으로 올라간 상태에서도 〈파르지팔〉에 이르기까지 바그너에게는 여전히 오페라가 있었다. 입센의 경우에도 이따금 뒤마 2세 연극의 삐걱거림이 드러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완벽하게 만드는, 종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창조적인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은 내적으로 변하면서 처음의 것에서는 짐작도 못할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입센과 바그너」중에서
“진짜 인내는 큰 탄력에서 나온다”라고 노발리스는 쓴 적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내심이 진짜 용기라고 찬양했다. 이 사람 바그너가 자신의 소명을 완성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신체적·도덕적으로 탄력, 인내심, 용기 등이 통합된 힘이다. 천재의 독특한 생명 유지 체질, 곧 감수성과 힘, 연약함과 끈질김이 이렇게 잘 통합된 경우를 다른 예술가의 생애에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스스로 놀람’이 혼합된 말이다. 이런 혼합에서 그 위대한 작품들이 나왔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만의 과제에 의해 연장된다는 느낌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작품의 형이상학적인 고집을 믿지 않기가 어렵다. 곧 저의 완성을 지향하면서, 작품 생산자의 삶을 단순한 도구로, 자발적/비자발적 제물로 삼아버리는 의지 말이다. “정말이지 비참한 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있다.” 이것은 바그너의 편지에서 나온, 절망해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비웃는 외침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통과 예술성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아냈다. 예술과 질병이 같은 재난임을 파악했던 것이다.
---「바그너와 우리 시대」중에서
바그너의 매체가 오로지 문학 언어일 뿐이었다면 그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음악가이기도 했지요. 문학 언어나 음악 언어 둘 중 하나를 주로 삼고 다른 하나를 곁들이거나 아예 둘 중 하나만 쓰는 게 아니라, 둘을 동시에 그것도 근원적 통일성 안에서 이용하는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작가이면서 음악가였고, 음악가이면서 작가였던 겁니다. 문학에 대한 그의 관계는 음악가로서의 관계였지요. 그의 음악이 그의 언어를 원시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기에, 음악이 없으면 그의 대본들은 단지 절반의 작품이었을 뿐이죠. 음악에 대한 그의 관계는 순수하게 음악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이기도 했어요. 그의 음악의 정신성과 상징성, 그 의미 매력, 기억 가치와 연관성 마법[주로 문학적인 요소들] 등이 이 관계를 결정적으로 규정한다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의 음악적 문학성은 그가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을 점차 버리도록 이끌었고, 주제-동기에 따른 새로운 구성 기법을 그에게 부여했던 것입니다 ─ 이 기법은 연관성이 풍부하게 확장되어 작품 전체에 적용되었기에 새로운 것이었죠.
---「리하르트 바그너와 『니벨룽의 반지』」중에서
나치즘이란 바로 다음과 같은 뜻이지요. “나는 어떤 종류든 사회적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민속 동화야.” 현실에서 나치즘은, 정치의 영역에서 동화는 거짓말일 뿐이라는, 또 다른 사실에서 튀어나온 지저분한 야만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온갖 비열함을 지닌 나치즘은 독일 정신이 지닌 신화 성향과 정치적 순진함의 비극적 결과입니다. 여기서 비어렉 씨보다 조금 더 나아가보지요. 나는 문제 많은 바그너의 문헌에서만 나치즘의 요소를 보는 게 아니라, 그의 ‘음악’,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으니까요. 물론 더욱 높은 의미에서 그러는 거지만. 지금도 나는 바그너 작품 세계의 몇 소절이 내 귀를 때릴 때면 마음이 깊이 설렐 정도로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열광, 우리를 자주 사로잡는 장엄한 감정은 오로지 가장 위대한 자연이 우리에게 만들어내는 감정하고만 견줄 수 있지요. 높은 산봉우리 위의 저녁놀이나 폭풍우 치는 바다가 불러내는 감정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르네상스 이래로 지배적인 사회와 “문명에 맞서도록” 창조되고 지휘된 이 작품이, 히틀러 사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부르주아-인문주의 시대를 벗어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코먼 센스〉 편집자에게」중에서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나치즘은 물리쳐야 합니다. 이 말의 실질적 의미는 불운하게도, 독일을 물리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분명한 의미로 말하는 것이며, 또한 영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독일이 있을 뿐, 좋은 독일과 나쁜 독일이라는 두 개의 독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온갖 끔찍한 모습을 지닌 히틀러는 우연히 생겨난 현상이 아닙니다. 특별한 심리적 전제 없이는 절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인플레이션, 실업, 자본주의 투자, 정치적 음모 등보다 더 깊은 곳에서 찾아내야 하는 전제입니다. [이 나라 저 나라] 국민들이 항상 동일한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참입니다. 그들의 지속적인 특질이 어떤 모습인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날의 독일은 매우 섬뜩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세계를 괴롭히고 있죠. 그것이 ‘악해서’가 아니라 동시에 ‘착하기도’ 해서입니다. 앵글로색슨 유머는 이런 모습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저 존경할 만한 [영국 정치가] 해럴드 니컬슨의 말도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독일의 특성은 인간 본성의 발전 중 가장 섬세한 것이면서도 매우 불편한 것 중 하나다.”
---「〈코먼 센스〉 편집자에게」중에서
쇤베르크의 집에서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만났는데, 그의 톡톡 튀는 대화를 나는 언제나 몹시 좋아했다. 특히 주제가 바그너가 되고, 또 이 위대한 선동가[바그너]에 대한 그의 태도의 우스꽝스러운 모호함이 주제가 되면, 아이슬러가 공중에서 손가락을 흔들며 쇤베르크에게 덤벼들어 “이런 늙은 악당 같으니!” 하고 외쳐대면 나는 자주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아이슬러와 쇤베르크가 나의 권유로 피아노 앞에 앉아 파르지팔-화음에서 녹아들지 못한 불협화음을 찾아보던 일이 기억난다. 정확하게 따져서 그런 불협화음이 단 하나 있었다. 제3막의 암포르타스 부분에 나타나는 것. 이어서 내가 여러 이유에서 탐색하고 있던 옛날 방식의 변주들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쇤베르크는 내게 그런 몇몇 예들을 보여주는 악보와 부호들로 구성된 연필 자필 서명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파우스트 박사』의 형성 과정’에서」중에서
의기소침, 장애, 곤궁, 절망은 위대한 착상에 방해물이 되지 못한다. 특정한 경우 이런 것들은 오히려 가장 유리한 토대가 된다. 강인한 생명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수호신이 이리로 흘러들도록 끌어들이는 것이고, 과제를 지닌 사람은 죽지 못한다. 이 사람은 어려서는 가냘프고 병약한 아이였고,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나 피부염, 소화불량, 불면증, 전반적인 신경쇠약 환자였다. 서른 살에 이미 “자주 주저앉아 15분쯤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탄호이저〉를 끝내기도 전에 죽을까 두려워했고, 서른다섯 살에는 자신이 너무 늙어서 『니벨룽의 반지』 구상을 완성하려는 계획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지쳐 있었고, 모든 순간에 “거덜 나” 있었으며, 마흔 살에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더니 거의 일흔 살이 다 되어서 평생 작품이라는 구조물, 마법적 지성의 매우 치밀하고 위대한 구조물 위에 〈파르지팔〉이라는 왕관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야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지. 이것은 경이롭고 놀라운, 영원히 매혹하는 창조의 삶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서한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