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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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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2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93쪽 | 354g | 138*200*20mm
ISBN13 9791188605248
ISBN10 118860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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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체계 안에서 돌봄에 의존하는 것은 구차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한 대접을 받는 일이다. 돌봄에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 소속, 능력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고 의존을 이유로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근거로 인권은 돌봄으로서, 돌봄은 인권으로서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
--- pp.30~31

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을 내가 인간으로서 기억하고 대우함으로써 당신의 인간됨이 지켜지고 획득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도 인간이 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당위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에 부합하기에 인간으로 여긴다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존엄함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당신과 나는 서로 부대끼며 매 상황을 조정해가야 한다. 상상이자 추상으로서의 존엄한 상태는 이념적 지평으로서 우리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갈등 상황에서 일종의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다.
--- p.44

존엄을 개인주의적인 권리 틀에 가두지 않고 사회적 돌봄과 정치적 실천 속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인간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는가? 개별 인간? 인류로서의 인간? 취약성을 공통분모로 서로 연루된 관계 속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에 대한 인정 관계, 당신만이 아니라 나 또한 의존하고 있다는 보편적인 상호의존하는 관계,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인간으로 만나 서로 돕고 기대며 함께 삶을 산다.
--- p.47

돌봄 현장은 병상 같은 물리적 장소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집 안이든 어디든 모든 돌봄 현장의 의미는 정치성을 갖고 있다. 돌봄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이나 그에 따른 시민의 자격 심의와 연동될 때 돌봄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인 인식과 실행의 체계는 ‘어떤 삶은 돌볼 가치가 있고 또 어떤 삶은 돌볼 가치가 없다’, ‘누구에게 돌봄 자원을 쓸 가치가 많다 혹은 적다’는 식으로 흐른다. 이런 식의 논의와 판단은 매우 정치적이다. 존재 가치를 저울질하는 대신 시간과 정성을 같이 기울이되, 획일적이 아니라 각 사람의 고유성을 서로 잘 돌보는 사회가 호혜적인 민주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라야 ‘좋은 돌봄’이 가능하다.
--- p.75

폐 끼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존재들은 폐 끼치기의 호혜성을 위해 시민사회 차원의 토론과 각성을 추동한다. 의존과 돌봄을 무시하려는 사회적 과정과 흐름을 중단시키고 돌봄의 연대를 추동한다. 의존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철폐하려 한다. ‘폐 끼치는 사람들의 연대’야말로 서로의 차이를 넘어 의존에 대한 공통 감각을 시민적 덕성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다.
--- p.117

비임금노동을 하는 사람, 의존 상태에 있는 사람은 노동하는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다. 노동할 수 있는 몸이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몸이기에 그렇지 않은 몸은 ‘비정상적’인 몸이 된다. 생산적인 노동에 복무할 수 있음은 독립성과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고 그에 걸맞은 성별과 인종이 위계적으로 배치된다. 돌봄에 결부된 ‘민폐’라는 낙인을 떼어내는 것은 노동/일과 가치를 둘러싼 개념의 항쟁, 전환을 말한다.
--- pp.119~120

임금을 비롯한 노동 조건, 여성에게 전가되고 여성화된 일이라는 점을 떠나서 보면 돌봄노동은 좋은 노동일 수밖에 없다. 타자에게 관심과 보살핌을 기울이는 것은 사람 사이/관계를 만들고 확장하는 활동이다. 돌봄이 기꺼이, 즐겁게 같이 나누고 같이 할 수 있는 활동이 되어야 돌봄노동의 가치와 대우도 높아질 것이다. 돌봄노동의 의미와 가치는 전체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에 두는지에 따라 위계와 위치가 달라진다. 당장의 급한 불 끄기, 또는 시혜적 조치로서 임금 인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볼 만한 환경을 위해 사회 전반이 공유하는 책임, 돌봄노동자를 돌보는 사회적 연대의 장치가 작동하는 시스템의 변화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
--- p.165

유엔 사회권 규약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인권의 최소한의 질을 보장할 수 있도록 가용 자원을 지혜롭게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각 권리의 최저한의 필수적 수준(minimum essential levels) 충족을 보증하는 데 실패할 때, 국가의 최소한의 핵심 의무(a minimum core obligation)가 침해된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한테만 권리를 보장하라는 게 아니다. 모두에게 동등한 일반적 권리 체계 위에서, 취약성에 더 민감하게 대응하는 특별한 권리 체계를 한 층 더 입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페인트를 한 겹은 반드시 칠해야 하는데 특히 어두운 곳은 한 겹 더 두텁게 칠할 필요가 있듯이 말이다.
--- p.219

예산 편성과 집행에서 더 나아가 돌봄이 공적 가치로 주류화돼야 한다. 건물을 지을 때도 교통정책을 펼칠 때도 노동정책에도 돌봄이 스며들어야 한다. 돌봄을 주변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시혜적이고 잔여적인 조치라 여기지 말고 돌봄을 국가 행위에서 주류화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나 여성가족부의 관할 사항이라고만 여기지 말고 기획재정부 같은 곳의 주무 사항이 돼야 한다. 정부의 모든 행위에 돌봄을 중심 요소로 들어앉히고 특정 정책이 돌봄을 무시하고 훼방하는지 혹은 돌봄을 촉진하는지를 검수해야 한다.
--- pp.27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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