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1-18절)에서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주제는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14절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요한복음의 요절로 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성전’ 모티브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나오는 ‘거하신다’는 직역하면 ‘장막을 치다’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광야 성막을 연상시키고 더 나아가 솔로몬 성전을 떠올리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로고스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 창조주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은 다름 아니라 ‘성전’이 되신 사건이라는 겁니다. 성전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입니다. ⑵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곳입니다. ⑶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드려서 사죄를 받고 하나님과 백성의 교제가 있는 곳입니다. 이제 이 성전의 역할을 예수님이 하실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었는데, 이제 예수님께 영광이 임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회복된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말씀으로, 빛으로, 성전으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요 1장)”」중에서
2-4장의 큰 구조를 보면 두 개의 표적이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가운데 부분인 2-3장에는 성전 척결 사건과 유대인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나오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이 4장에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대조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육적인 기준, 땅의 기준, 혈통의 기준으로만 보면, 구원에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자들과 구원에서 가장 멀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더 이상 혈통이나 인간적인 조건이 중요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시대를 열고 장벽을 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요 2-4장)”」중에서
5-10장에서는 예수님이 구약의 절기들을 완성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5장에는 안식일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이 등장하고, 6장에서는 유월절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7-8장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9장에는 맹인을 치유하시는 빛 되신 예수님이 등장하고, 10장에서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으로 등장합니다.…앞서 1장의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라는 말씀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5-10장은 이 구약의 말씀과 절기들과 성전을 완성하시고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참된 생명은 바로 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결코 유대교의 율법 체계나 성전 체계에 순응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요 5-10장)”」중에서
11-13장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실 일,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생명을 주는 일을 구체적으로 해나가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이미 10장에서 자신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인자가 들린다’, ‘내가 가는데 너희는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다’(8:21)라고도 하셨습니다. 또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다’(7:33)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곳이 어디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면, 이 ‘온다’, ‘간다’는 말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곧장 부활과 영광으로 이어지는 전체 과정의 한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어조는 침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때를 자신이 정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정할 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었고,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이를[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10:18) 하십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듣고 귀신 들려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4. 섬김과 살림의 사랑으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요 11-13장)”」중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무위로, 허사로 바꿔 버리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제자들의 시간은 절대 무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죽음을 통해 이루실 일이 무엇이기에 그럴까요? 죽음 아니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모네’)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토포스’)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토포스’)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2-3).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전에는 대개 미래의 천국에서 누릴 거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너희가 있을 집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아버지 집”은 성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거처”로 번역된 ‘토포스’ 역시 ‘성전’을 가리키는 단어로, 요한복음에서 쓰입니다(4:20; 11:48). 또 “아버지 집”에서 ‘집’(‘오이키아’)은 장소로서의 집(house)뿐만 아니라 관계로서의 ‘가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지금 가는 것, 즉 십자가와 부활은 자신이 성전이 되는 일인데(거처), 장차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로 오시면 제자들도 성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새로운 가족,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 또 예루살렘의 성전을 헐면 자신이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새로운 성전이 필요합니까? 그들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2:16).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5. 우리를 성전 삼아 거하려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요 14-17장)”」중에서
요한복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약속으로 시작되었고,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도전적인 질문과 “나를 따르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그 이름을 믿는다는 뜻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사랑하며 살고 싶다고 소원을 아뢸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 이웃을 위해 뒷걸음질하여 그들의 공간을 내 안에 마련해 준다면, 내게 주신 분량만큼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진실로 영생의 사람, 생명의 사람입니다. 또 마지막 날에 우리는 살아날 것입니다. 이제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으로 먹이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그 사랑을 증언하고 보여 주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6. 죽을 만큼 사랑하려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요 18-21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