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는 년대에 미술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용어 중의 하나였다. 미술가들은 전위적인 작가가 되고자 노력했으며, 현대미술은 ‘아방가르드(전위)’와 동의어라고 여겼을 정도다. 그러나 ‘전위’라는 단어가 남용되면서 그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미술가들이 추구하는 전위의 방향 또한 시기마다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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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미술의 담론에서 최고의 시기를 구가한 듯 보인다. 193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 조선 화단에 소개되었지만 이내 잠복한 추상은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초중반 한국 미술의 현대화를 위한 방법으로 복귀하여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1960년대 ‘앵포르멜’ 화풍의 안착으로 미술대학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자연주의적 묘사에 근거를 둔 사실주의 화풍과 지배권을 양분하고 1970년대 ‘모노크롬’ 화풍이 고급 미술 제도의 보증을 받으면서 그 위상은 절정에 이른다. (…) 이렇게 추상이 한국 미술의 지배적인 실천이 되는 데에 30년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전개가 전후 한국 미술의 취약성과 국제 미술계에 대한 의존성(혹은 ‘새것 콤플렉스’)을 보여주는 일이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내에 추상의 부상과 지배를 이해하는 보다 생산적인 접근법은 그것이 변주를 거듭하며 당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미술적 관심사와 쟁점이 다뤄내는 장으로 기능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는 일이다.
--- p.95
동양화가 언제나 전통이라는 화두를 내려놓지 못한 까닭이다. 동양화 작가들은 전통의 수호와 계승을 당연한 임무로 여겼지만, 이러한 상황에 회의도 느꼈다. 동시대 미술계에서 동양화와 서양화가 동등하게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양 미술의 양식과 부합하는 조형성을 찾되, 이 조형성은 반드시 전통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이 완성되어야 동양화와 여타 장르를 구별할 수 있는, 동양화만의 특성이 표출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 p.187~189
민간 재단의 지원은 공공외교의 일환으로 추진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Fulbright Program)과 더불어 한국 내 친미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하였으며, 그 수혜자들은 정치, 경제, 문화 영역을 주도하는 권력 엘리트가 되어 한국 사회에 미국의 가치와 이념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술 분야에서의 민간 원조에는 아시아 재단과 록펠러 재단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아시아 재단의 한국 미술계에 대한 지원은 대체로 학생 미술 경연 대회, 강연 투어, 미술 재료 및 여행 경비 지원, 전시회 지원, 화랑 운영비 지원 등 소규모이지만 한국 미술계가 당면한 현실적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아시아재단은 한국 문화계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록펠러 재단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조형문화연구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등의 기관에 재정적 지원을 해주거나 김창열, 윤명로, 최만린, 김환기, 김차섭, 김병기, 박종배 등의 미술가들에게 교육이나 현장 시찰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아시아 냉전의 주 무대였던 한국에서 미국 정부와 민간 재단 주도로 이루어진 다양한 원조와 문화 교류 프로그램은 궁극적으로 한국 미술계의 제도적 정착과 안정에 기여하였다.
--- p.256
AG라는 것은 아마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미술운동이었고, 한국 미술 최초로 순수 회화, 입체, 해프닝, 체험 미술 등 모든 미술 작가들과 그들뿐만이 아니라 평론가들이 모두 모여서 한 그러한 운동이었다. ‘이론을 중요시했는가’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이론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오리진 회화운동이라든가, 《청년작가연립전》 운동이라든가, 기타 그 전에 앵포르멜 운동이라든가, 악뛰엘 운동이라든가 이런 미술운동이 있으면서, 운동으로서, 연립전으로서 작가들이 행위적 미술만이 한국 전위미술 운동, 실험미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이것을 논리화시키고 체계화시키고 이론화할 분이 필요하다, 또 그런 미술운동이 이루어져야만 어떠한 논리에서 미술의 타당성과 합리성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론하는 분들을 모셨다. 또 미술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정립시켜야 되고, 이걸 후대에 물려줘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한국 최초로 작가들이 자비로 『AG』라는 무크지를 만들었다.
--- p.366~367
ST는 69년도에 시작해서 1981년도에 문을 닫는다. 그러니 10년 동안을 활동한 것이다. AG 그룹은 69년에서 75년 6년간. 그러니까 ST는 배를 활동한 것이다. ST에서 스터디했던 것들은 본질적으로 ‘미술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첫 번째로 우리가 소위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관 공간이 무엇인가 하는, 전시 공간에 대한 발전사를 스터디했고, 두 번째로, 조각에 있어서 좌대, 평면 회화에서도 액자, 틀,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아주 심도 있게, 몇 주 동안을 공부했다. 세 번째로, 미술가가 창작 행위를 하는 데 만든 것과 만들지 않은 것의 관계를 공부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술 하면 회화(그림)는 그리고 조각은 조각한다는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는데, 당시 ST회는 그 당연한 관습적 인식의 관념을 의심하고 창작의 원초적 행위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의 관계’, ‘조각한 것과 조각하지 않은 것의 관계’ 이런 것을 심도 있게 토론했다. 네 번째로, 사물과 언어에 대한 문제,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관해서 우리가 심도 있게 공부했다.
--- p.389
현대 동양화단이라고 하면, 저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한국화라는 용어 문제이고, 또 하나는 어떤 것을 현대성이라고 할 것인가 하는, 동양화단의 현대성 문제이다. (…)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사용하는 것은 1980년대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이 ‘한국화’라는 용어이다. 한국화라는 단어를 쓸 때 한국화로서의 정체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 p.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