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과학과 종교는 실재의 다른 차원을 탐구한다.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유일한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영향력 있는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개개의 과학 분야는 각자의 연구과제와 탐구영역에 적합한 연구방법을 개발한다. “우리가 관찰한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탐구방법에 의해 드러난 자연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이젠베르크의 요점은 과학이 다양한 연구방법을 요구하기에 실재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통찰이 그만큼 다양해지며,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통합해야만 자연을 전체적으로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연세계와 인간 경험의 복잡성을 둘 다 인식하고, 다양한 접근방식과 지성적인 결과를 인정하는 설명을 제시했다. 그는 예술과 종교를 자신의 전체적인 접근방식에 포함시켰고, 그것들을 자연과학과 구별함과 동시에 그 문화적 정당성과 지성적 독특성을 기꺼이 인정했다. 예술과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방법을 통해 나타난 결과이며, 다양한 탐구방식을 요구하는 인간의 실재 경험을 묘사하는 조각들이다.
이런 틀은 과학과 종교에서 비롯된 독특한 ‘지적 생산물’을 인정하게 하는 중요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과학과 종교를 혼동하거나 혼합하려는 시도를 피하고, 둘의 차이를 존중할 뿐 아니라 거기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차원의 지식들을 통합할 가능성이 열린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거듭 언급한 대로, 자연과학은 주로 사물이 기능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종교는 그것들의 의미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둘은 인간 존재의 서로 다른 차원에 관여하지만, 통합하면 인간의 독특한 본질을 좀 더 온전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01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모색하다」중에서
갈릴레이를 둘러싼 논쟁은 과학과 종교,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대결을 뜻하는 의미로 종종 묘사되지만, 실질적인 쟁점은 성경의 정확한 해석과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역사가들이 이 논쟁과 관련된 신학적(더욱 정확하게는 해석학적) 문제를 다루지 않은 까닭에 논쟁의 핵심을 옳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울러 이 특별한 논쟁에 관심을 기울였던 학자들 다수가, 혼란했던 시기에 벌어진 성경 해석에 관한 논쟁의 복잡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과학자들 또는 과학사 연구가들이었다는 것도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갈릴레이와 그의 비판자들이 벌인 논쟁의 실질적인 쟁점은 특정한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 있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적응’의 문제가 이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 문제를 옳게 파악하려면 1615년에 출판된 한 가지 중요한 자료를 살펴보아야 한다. 가르멜수도회(the Carmelite) 수도사 파올로 안토니오 포스카리니(Paolo Antonio Foscarini)는 『피타고라스학파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에 관한 서신(Letter on the Opinion of the Pythagoreans and Copernicus)』에서 지동설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포스카리니는 자신의 분석을 통해 성경 해석의 새로운 원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통적인 성경 해석의 원칙을 설명하고, 적용했다.
“성경이 다른 식으로 설명하면 적절하지도 않고 적합해 보이지도 않는 것을 하나님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과 연관시켰을 때는 다음 방법들 가운데 한두 가지를 택해 설명하고 해석해야 한다. 첫째, 그런 경우는 은유나 비교나 유사의 의미일 수 있다. 둘째,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이해와 지식에 적합한 방식을 따른 것일 수 있다. 셋째, 그것은 일반적인 화법과 통속적인 견해에 적합한 방식을 따른 것일 수 있다.”
포스카리니가 말한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세 번째 성경 해석방법, 즉 ‘적응’의 개념에 근거한 방법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성경 해석방법은 기독교시대 초창기부터 활용된 것이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없다. 포스카리니가 이룬 새로운 혁신은 그가 채택한 성경 해석방법이 아닌 그 방법을 적용한 성경 구절과 관련이 있다. 포스카리니는 그 당시까지 많은 사람이 문자적으로 해석해온 성경 구절들을 적응의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움직이는 듯 암시하는 성경 구절들에 이 해석방법을 적용했다. 포스카리니는 이렇게 주장했다.
“성경은 우리의 사고양식과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그런 이유로 이 본문들은 우리와 연관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인간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고양식을 반영해, 즉 지구는 고정되어 있으며 태양이 그 주위를 도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이처럼 성경은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우리를 돕는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가 중심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고, 태양은 그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갈수록 더욱 신뢰했기 때문에 포스카리니와 비슷한 성경 해석방법을 채택했다.
---「02 논의의 출발점 : 몇 가지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중에서
과학철학은 일반적으로 자연과학과 관련이 있거나 그것을 통해 야기된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 문제들 중에는 “자연법칙이란 무엇인가? 어떤 자료를 이용해 진정한 원인과 우연적인 규칙성을 구별할 수 있는가? 가설이 받아들여지려면 어떤 증거가 필요한가? 과학자들 스스로도 부정확한 측면이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형들과 이론들을 사용하는 이유
는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들이 포함된다.
그중에는 철학의 전통적인 주제들과 겹치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어느 한도까지 과학철학을 고유한 학문 분야로 인정할 것인지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이는 이른바 ‘자연법칙’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연법칙이란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규칙성이나 질서를 나타내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이 ‘규칙성’은 자연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정신이 자연에 인위적으로 부여한 것일까? ‘법칙처럼 보이는 이것’은 자연 안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아니면 자연에 투사된 것일까?
관찰된 사실에 일정한 유형을 만들어 부여하려는 인간 정신의 경향성에 관한 논쟁(이 논쟁은 특히 18세기 말에 데이비드 흄을 통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은 일반적인 철학의 관심사이지만, 자연과학과 관련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른 철학적 논의는 자연과학과 좀 더 구체적으로 관련된다. 예를 들어, 어떤 실험을 했더니 특정한 형태의 소립자가 존재하는 것 같은 징후가 발견되었다. 이 소립자는 그 자체로는 관측할 수가 없지만, 그 체계의 다른 측면들의 작동방식을 살펴보니 거기에 포함된 것처럼 보인다. 관찰되지 않고 가설적으로만 존재하는 이 소립자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실험적 관찰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론상의 소립자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익한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들이 통하는 이유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바꾸어 말하면, 일종의 실재론이 자연과학이 성공을 거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과학철학과 관련된 많은 문제가 종교적, 신학적 사색과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과학과 신학을 잇는 개념적이고 방법론적인 연결 고리를 제공한다.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현실이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구성하는지, 현실에 대한 가능한 설명들을 평가할 때 어떤 기준을 적용할 것인지와 같이 과학적 논의와 신학적 논의는 많은 면에서 명백히 유사하다.
---「03 과학철학과 종교 : 과학철학은 종교적인 논의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중에서
이 책의 앞부분에서 설명이 자연과학과 기독교 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잠시 살펴본 바 있다. 자연과학에 있어 설명은 자연세계에 관해 누적된 관찰결과들을 어떻게 설명할지에 관한 문제다. 어떤 ‘이론’이 관찰결과들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까? 3장에서 살펴본 대로 여기에는 ‘최상의 설명을 도출하는 추론’의 과정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런 설명도 증거가 쌓이고 분석이 진행됨에 따라 항상 재평가되고 수정될 여지가 있는 ‘잠정적인 설명’으로 여겨진다. 오늘은 현재 이용 가능한 증거를 토대로 어떤 과학적 이론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내일은 새롭게 확보된 증거나 수정된 옛 증거로 해석한 것을 토대로 그와는 사뭇 다른 과학적 이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 화학자이자 저명한 과학철학자인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가 지적했듯이, 자연과학자들은 나중에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지만, 현재의 신념들 가운데 어떤 것이 나중에 오류로 드러날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과학이론은 현재 이용 가능한 실험적 관찰결과에 관한 최상의 설명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제시한다. 획기적인 이론의 변화는 현재 알려진 것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이 있다고 믿을 때나, 현재 알려진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하는 새로운 정보가 드러났을 때 이루어진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한, 어떤 이론이 ‘옳은지’를 확실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미래 세대가 오늘날의 이론 가운데 어느 것을 흥미로운 실패로 간주해 폐기할지 알지 못하고, 또 알 수도 없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 기존의 이론이 부적절하거나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신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과학이론의 ‘일시성’을 강조하면, 과학과 종교는 ‘전쟁’ 관계라는 견해와 종종 맥을 같이하는 시대착오적인 실증주의는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은 이것을 사실로 입증했다.”라고 선언하지만, 좀 더 지혜롭고 사려 깊은 과학자들은 “지금은 과학계 내에서 이것이 옳다는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이지만, 앞으로 더 많은 증거가 쌓이면 바뀔 수도 있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는 자연과학 자체를 비판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단지 과학적 방법이 기능하는 방식을 염두에 둔 말이다. 과학사 연구가들은 과거에는 정통적인 과학이론으로 인정되었던 것들이 지금은 부정확한 것들로 간주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04 종교철학과 과학 : 종교철학은 과학적 통찰력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중에서
모형은 복잡한 체계들을 시각화하거나 이해하는 데 유익한 방법이 틀림없다. 그러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자연과학의 모형 사용과 관련해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첫 번째 오해는 모형이 그와 관련된 체계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자의 구조를 작은 태양계처럼 표현한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은 지극히 작은 중심부에 질량이 집중된 것과 같은 원자의 특징 몇 가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설명과 해석을 돕기 위해 원자를 시각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모형은 분명 모형화된 체계와 어느 정도 관련을 맺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두 번째 오해는 모형의 모든 측면이 모형화된 체계에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모형과 모형화된 체계는 일면 서로 닮았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이 두 번째 요점을 이해하기 위해 이 문제와 관련된 한 가지 좋은 사례를 살펴보자. 바로 ‘소리’라는 유용한 유비를 사용해 ‘빛’을 묘사하면서, 소리가 전달될 때 매개체가 필요하듯이 빛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유추한 가설이다.
---「05 모형과 비유 : 과학과 종교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어떻게 시각화하는가?」중에서
그러나 이런 형태의 과학주의는 몇 가지 심각한 비판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과학은 스스로를 확증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전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어떤 실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악순환적 논증에 갇힐 수밖에 없다. 과학주의는 사실, 자연과학에 접목된 다소 공격적인 자연주의 철학에 해당한다. 과학을 ‘모든 흥미로운 문제들의 궁극적인 기준과 중재자’로 간주하는 부풀려진 형태의 과학주의는 실제로는 과학에 관한 이차적인 철학적 주장에 불과하고, 이 주장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논박하려면 과학적 논증이 아닌 철학적 논증이 필요하다. 미국의 철학자 에드워드 페저(Edward C. Feser)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과학이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성적 특권에 대한 그럴싸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이 순환 고리를 끊으려면 과학에서 ‘빠져나와’ 과학 이외의 관점에서 과학이 실재에 관한 정확한 설명을 제시한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만일 과학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오직 과학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 이외의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오직 과학만이 객관적인 실재를 탐구하는 합리적인 수단을 제공한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할 것이다.”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과학주의의 그런 주장을 오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자 티머시 윌리엄슨(Timothy Williamson)은 로젠버그의 접근방식으로는 수학의 성공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자연주의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과학적 방법에 더 큰 특권을 부여한다. 수학은 인류 지식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성공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수학은 실험적이거나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추론을 통해 결론을 입증한다. 이것은 실재를 탐구하는 방법에 관한 로젠버그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설명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수학적인 증명은 관찰적이거나 실험적인 방법만큼이나 효과적으로 지식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윌리엄슨이 ‘자연과학을 통해 모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자연주의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을 사실로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줄 근거는 무엇인가? 윌리엄슨의 지적은 논박하기가 어렵다. “만일 자연과학을 통해 모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진리가 자연과학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는 것도 자연과학을 통해 사실로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은 모든 진리가 자연과학을 통해 발견된다는 것을 사실로 밝혀낼 수 없다. ‘자연과학을 통해 모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것은 자연과학의 물음이 아니다. 따라서 극단적인 자연주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철학자 메리 미즐리(Mary Midgley)는 “과학주의의 잘못은 한 가지 형태의 지식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아니라, 한 형태의 지식을 나머지 지식과 단절시켜 그것을 다른 모든 지식을 몰아내는 승리자로 간주한 것에 있다.”라고 지적했다. 인간의 논의와 경험들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로 축소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요구한다면, 그것이 과학적인 것이든 다른 무엇이든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미즐리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 대부분이 서로 다른 다양한 개념적 도구 상자를 함께 사용하기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실재에 관한 하나의 관점이 규범이 되도록 허용한다면, “기이할 정도로 제한적인 가치관”이 고착될 수밖에 없다. 미즐리의 접근방식은 복잡한 실재에 관한 “다채로운 지도”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단일한 접근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정신으로 우주를 최대한 많이 이해하려면 각도가 서로 다른 접근방식과 탐구방법론이 필요하다.
---「06 오늘날의 몇 가지 중요한 논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