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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연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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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1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418g | 134*200*26mm
ISBN13 9791165346850
ISBN10 1165346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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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의 자리 앞에는 잡지에서 오려놓은 것 같은 사진들과 나뭇잎, 패브릭, 여러 가지 사물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지난번에 수현 씨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다고 하셔서, 오늘은 콜라주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콜라주는 불어로 ‘풀로 붙이다’라는 뜻이거든요. 여기 준비해둔 여러 재료를 접착제를 이용해서 붙여나 가면서 수현 씨의 생각이나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시면 돼요.”
콜라주는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미지나 재료들을 합성하여 작업하는 미술치료 기법이다. 내담자가 의식하면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랜덤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표현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을 표출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특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것까지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미술치료사의 관점에서, 수현이 어떤 특정한 사건 하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열네 살 때의 트라우마로 인한 ‘심 인성 기억상실증 (psychogenic amnesia) ’일 확률이 높다. 심인성 기억 상실증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스스로 그때의 기억을 지우려고 하는 경향에서 발생한다. 콜라주는 심인성 기억상실증을 치료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내담자들이 감당하기 힘든 기억의 조각들이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는 사물들을 배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완전한 기억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기억이 더 남아 있는 걸까?’ 여태까지 수현과의 상담 세션을 통해, 그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의 사고와 죽음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다뤄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사건 당일의 날씨며, 병원에서 연락을 받은 시간, 장소, 그리고 애벌레같이 제법 자세한 디테일까지 기억하고 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설마 어린 소년이 하루 아침에 엄마를 사고로 잃고, 엄마가 철철 흘린 피를 보았던 그 사건 보다도 더 극심한 트라우마가 있는 건가?

희주는 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를 보면서, 그의 안에 있는그 소년을 보았다. 고작 열네 살짜리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잔인하리 만치 혹독했을 아이의 시간들이 함께 떠올랐다. 마음이 끊어지는 것같이 아려왔다. 지금이라도 당장 수현 안에 있는 그 소년을 꼭 안아 주며 말해주고 싶었다.
‘……이젠 여기로 와. 여기서 편하게 쉬어.’
일단은 수현을 심리적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심인성 기억상실증은 괴로운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에서 기인하는 질병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 하다가는 오히려 더 심한 방어기제가 형성될 수도 있었다. 먼저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 만들기’ 기법으로 그의 안에 높게 세워져 있을 마음의 장벽을 낮추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수현 씨가 살아오면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했던 장소를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상상 속에 존재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어요. 꿈에서 봤던 장소일 수도 있고요.”
희주는 수현에게 잠시 시간을 주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에 수현 씨가 직접 가서 서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힘들거나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지 그곳에 갈 수 있어요. 그곳에 가면 정말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해지니까요.”
그녀는 수현 앞으로 적당한 크기의 상자를 가져다 놓았다. 종이같이 아무런 제약 없는 자유로운 매체보다는, 틀이 있는 상자 안을 채워가는 형식으로 콜라주를 시작하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할 것이다.
“이 상자 안에 수현 씨가 생각하는 그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를 만들어주시면 돼요.”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작업을 시작했다. 여태까지 보여줬던 절제되고 조심스러운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가위질을 하는 그는 무척이나 신이 나 있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17. 그의 위험한 장소」중에서

수현은 민첩하게 주머니에서 졸레타놀 250mg이 들어 있는 주사 기를 꺼냈다. 그의 정맥을 찾아서 졸레타놀을 투약하려는 바로 그 순간, ‘훅……’ 하는 뜨거운 바람과 함께 흑곰 생에서의 마지막 숨이 그를 떠나갔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수현은 인이어로 다급하게 말했다.
“철수한다. 뒤처리를 부탁해.”
수현은 뒤에 있는 창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창진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해.”
그러나 창진은 여전히 그의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음험한 빨간 액체에 온통 정신이 빠져 있었다. 수현은 두 손으로 창진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창진아, 나가야 해!”
그제야 창진의 눈동자에 긴장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는 수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 그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 수현은 마지막 으로 흑곰의 방을 둘러보았다. 흑곰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그 마지막 거센 증오의 눈빛이 창이 되어 수현의 폐부를 깊숙하게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이렇게 미닫이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수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희주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 손에 가득 묻은 붉은 색의 저주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꼭 감고 있던 수현의 눈꺼풀 사이로 빛살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오셨어요?”
구원의 목소리……. 그를 구원해 줄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목소리를 듣는 순간 뜨거운 안개가 심장에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이 여자를 그냥 봐도 되는 걸까?’ 거대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이 여자의 눈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천천히 어렵게 그가 눈을 다시 떴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다 지니고 있는 것 같은 소망 하나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좀 늦게 오시나 싶어서 밖에서 기다리려고 나가는 중이었어요. 들어오세요.”
희주가 그녀의 작은 손으로 수현의 손을 잡고 공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을 때에서야, 수현은 아무 말 없이 깊은 눈빛으로 희주를 바라 보기 시작했다.
“머리가 갑자기 짧아졌죠?”
그의 조용한 응시에 머쓱해진 희주가 짧아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떤 남자애 하나는 선생님 너무 못생겨졌다고 막 울었어요. 정말 너무하죠?”
연보랏빛 수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희주를 보는데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서 끓고 있던 안개가 빗물이 될 것만 같았다. 수현은 차마 희주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뜨거워진 안개를 꾸역꾸역 다시 밑으로 내려보내야 했다. 어떻게든.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대체 어디서부터 시간을 되돌려야 할까? 흑곰이 자는 방의 미닫이문을 열기 전으로? 상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으로? 임 선생에게 보내지기 전으로? 그러다가 문득 그의 머릿속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첫 번째 살인, 그곳의 문을 열기 전으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던 그 사건. 그때 그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때 피를 토해내는 마음으로 그 괴물을 용서했었더라면……. 그러면 오늘이 여자 앞에 터질 것 같이 뜨거운 안개를 머금고 서 있는 끔찍한 괴물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늦은 후회였지만, 후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20. 초승달이 있는 곳」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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