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삶 그 자체라 혼동하는 내 일상, 내 직업, 내 관계들에서 벗어나 보려 시시때때로 멀리 떠나곤 했으나, 모르는 동네에서 며칠 보낸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몇몇 순간에는 비로소 마음속 깊은 곳까지 어떤 전제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세상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런 순간을 떠올릴 때면 마치 그 순간 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서 존재했던 듯한 느낌이 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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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리야 있나. 그렇게 어두운 방에 기대어 있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산다는 걸. 그런데 그 사실이 그냥 너무나 아무렇지가 않은 거야. 아무래야 하는 일이라는 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글쎄. 한 번도 스스로와 사람들을 동일선에 놓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렇다고 딱히 저항감 같은 것도 없고, 그냥 오빠는 멀리서 그 사람들을 구경해. 그들이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둘 사이에 태어난 생명에 감격하며, 부단한 노력으로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을. 마치 신처럼 말야. 나는 있잖아, 그런 건 대단한 능력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진심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것. 그런 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거든. 하지만 정말로는 걱정이 되기도 해. 결국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음악 하나를, 영화 한 편을 가슴 절절히 아름다워할 수 있을 때까지만 신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더 이상 춤을 근사하게 추지 못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신일 수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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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혼자 여행하며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는 순간에 으레 누군가를 떠올리곤 한다. ‘아무개가 이걸 봤으면 좋아했을 텐데’ 하고. 다만 그렇다고 지금 혼자인 순간을 불완전하게 여긴다거나 ‘다음번에는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하자’고 생각하는 식으로 자라지 않았을 뿐이다. 그 순간을 먼 곳에서 누군가를 절절히 생각하고 마음속에서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시간으로, 혼자임이 아쉬워서 더 완벽한 시간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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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절의 여행에서 당신은 끝없이 걷는 수밖에 없다. 도망치듯 타지로 떠나왔으나 근사하고 아름다운 여행 명소들에서 당신은 스스로가 투명인간이 된 듯 느낀다. 그렇다고 호텔방에 틀어박혀 있자면 당신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당신 자신이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사람이 걷기 시작하는 것은 거의 자연적인 인과관계라, 대도시에는 언제나 곳곳의 골목을 기웃거리는 이방인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이따금 눈을 감고 그들의 잠행을 지도 위 빛나는 점들로 상상해 보곤 한다. 찾아 헤매듯 걷는 사람들. 떨치듯 걷는 사람들.
--- p.121
그때, 7번 출구 끝에 이르러,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출구 옆에 서 있던 한 여인이 뒤를 돌아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활짝 웃어 보인 것이다. 꼭 기다리던 남자친구나 남편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정말로 내 뒤에 그녀의 지인이 서 있었다면 안타깝기라도 할 것 같은 미소였다. 아무 맥락 없이도 질투를 만드는 미소가 있다는 것, 꼭 그것과 연결된 게 내 존재였으면 하는 미소가 있다는 것. 그건 나도 그때 처음 알았다. 당황해 눈을 피하지도 못한 찰나 그녀는 입을 뗐다. “비 소식을 못 들었어요. 우산 좀 씌워 줄 수 있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답했다. “저는 중국어를 못 합니다.” 그녀는 잠깐 당황했다가 다시 영어로 말했다. “비 소식을 못 들었어요. 우산 좀 씌워 줄 수 있어요?” 그런 종류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나는 단번에 승낙했다. 내심은 인류애만이 아니었겠지만. 나는 우산을 펴면서 그녀의 첫마디가 내 마음에 퍼뜨린 파장을 곱씹었다. 중국어의 성조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리 멜로디컬하게 말을 걸게끔 되어 있구나. 아니면 그건 성조의 문제라기보다 중국인의 성정이려나? 혹은 상하이 사람의, 혹은 이 사람의 성정.
--- p.191
나는 때때로 은둔의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후미지고 조용한 어느 구석에 가서 속세를 잊고 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은둔의 욕망이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내가 차지해 온 세계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에 가깝다. 그리고 그건 우울이나 도피와도 성격이 다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초등학생 때부터 아무 이유 없이 종종 그런 상상을 하는 아이였다.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우리 집은 해 질 녘이면 창으로 새어 들어온 빛에 부유하는 먼지까지 다 보일 정도로 낡고 큰 집이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곧장 내 방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있곤 했다. 그러면 꼭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고, 내가 꼭 그 무無에 속한 것 같았다. 의자를 슬쩍 당긴 후 눈을 감고 집 안 곳곳을 떠올리면,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 그게 그렇게 달콤했었다는 게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 p.282
혼자 여행할 때의 나는 새벽에 숙소로 돌아가며 맥주 몇 캔을 산다. 숙소에 도착할 즈음이면 십중팔구는 만취 상태지만, 뻗어 눕기 전에는 내가 무엇을 아쉬워하게 될지 도무지 알 수 없으므로. 지금껏 내가 까 놓고 마시지 못한 채 곯아떨어져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방치됐던 맥주들, 그것만 다 모아도 드럼통 한 개는 족히 채울 것이다. 아깝긴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하루의 끝을 받아들이는 의식 차원의 공물이다. 침대에 풀썩 누워 TV를 틀고 맥주 한 캔을 따는 일련의 의식을 위한 공물. 물론 이국의 TV 방송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다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에 둘러싸여서도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만으로 얼마나 위안인지 모른다. 하루 종일 그런 것들에 쫓기고 나서는 말이다.
--- p.326
장례식과 결혼식.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신이 납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에 있을 때 더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때 소속감이란 ‘있어야 할 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지인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2인 공동체를 맺을 때, 그것을 축하해야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사회성과 당위의 힘을 필요로 한다. 어느 정도는 축하해야 하는 일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축하한다는 뜻이다. 그에 비하자면 상실과 부재에 유대하는 건 그저 인간으로서 자연스레 작동하는 기능과 같다.
---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