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품”(콜포스[kolpos]) 안에 계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콜포스는 “마음”(heart)으로 번역되기도 하고(New Jerusalem Bible, NRSV), “그분 곁에”(at his side)로 번역되기도 합니다(English Standard Version, New American Bible). 그러나 2가지 번역 모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오히려 그릇된 인식만 심어줍니다. 우선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는 이미 카르디아(kardia)가 있습니다. 하지만 카르디아가 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콜포스가 여기 말고는 13:23에만 나오는데요, 그 장면에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님의 품에 붙어서 기대고 있지, 그분 옆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는 친밀함이, 우리와 예수님/하나님 사이에도 있음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마음”이나 “그분 곁에”로 오역하면 이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접촉하는 것에, 땅의 일에, 그리고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사이의 선을 긋지 않는 것에, 불편한 감정이 든다면 다른 본문을 하나 더 보세요. 요한은 그와 같은 감정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친밀함 속에서 성육신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제1장 아무도 손대지 않은 소중하고 풍성한 생명」중에서
완전히 낯선 사람인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삶에 더 깊이 파고들며 그녀의 남편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으로 합당한 예배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깊은 신학적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여자의 남편에 대한 대화가 어떻게 그러한 대화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마리아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중략) 그래서 예수님, 곧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마리아의 야훼 신앙은 거짓 신을 향한 예배로 더러워졌고, 사마리아의 현재 ‘남편’?언약의 하나님과 사마리아의 관계를 지칭?은 언약 관계의 완전함 측면에서 볼 때, 진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요 4:17-18).”(여자가 대표하는) 사마리아는 다섯 남편들(이방 족속의 거짓 신들)이 있었고 여섯째 남편과도 바람직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남편, 진짜 신랑이신 예수님이 일곱째가 되시는데요, 숫자 7은 성경에서 완전, 완벽, 온전, 평화, 생명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제4장 이 여자가 없으면 복음이 역사하지 못하리: 사마리아 여자」중에서
제자들은 당장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9:2 새번역)라고 질문함으로, 고난이나 장애를 죄나 악행(적어도 미심쩍은 선택)과 연관짓는 우를 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곧바로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9:3 새번역)라고 딱 잘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말을 바로잡으십니다. 다시 말해, 죄와 고난이 서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한번은 제가 이 단락을 가르치고 있을 때, 다운 증후군이 있는 딸의 엄마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엄마가 수업 후에 저에게 다가와서 “그러면 교수님은 제 딸에게 다운 증후군이 있는 게 제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중략) NRSV에서 “그가 눈이 먼 채로 태어났다”라고 번역한 구절이 사실 그리스어 본문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은 이렇습니다(원문에 더 충실하기 위해 대문자와 구두점을 생략합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그 부모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제5장 시력과 통찰력」중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요한복음은 성령에 관해 다른 신약 본문들에 비해 좀 색다르게 생각합니다. 복음서들은 하나같이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에게 내려오는 것을 언급합니다. 또한 누가가 누가복음의 시작부터 사도행전의 끝부분까지 성령을 사람들의 삶 가운데 아주 활발하게 역사하는 분으로 묘사하는 반면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나서야 성령이 신자들을 위해 활동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9). 왜 이럴까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그 보혜사가 아니라 “또 다른(allon) 보혜사”(14:16)라고 부르신다는 데 실마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보혜사시고, 예수님과 성령이 똑같은 계시적 역할을 하시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계신 동안에는 성령이 활동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나쁜 소식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가장 좋은 소식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에는 한 지역에서 예수님 한 분만 사역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떠나시자 제자들은 곧 성령을 받고 견습생을 졸업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됩니다. 역사적 예수님은 만나지 못했더라도, 이후 제자가 된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한 일이 적용되기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전혀 불리하지 않습니다. 첫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경험한 모든 일을 우리도 같은 정도로, 똑같이 풍성하게 배우고 경험할 수 있으니까요.
---「제9장 집만 한 곳이 없다」중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19:26)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세요. 그리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19:27)라고 말씀하시죠. 사랑하시는 제자와 예수님의 어머니는 생물학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특별한 관계가 맺어집니다. 더는 생물학이 1차 범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첫째가는 가족이고, 우리의 “진짜” 친족입니다(단순히 생물학적 친족이 아니라요).
---「제13장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 수난」중에서
이에 대한 흔한 해석 방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아가파오(명사형은 아가페[agap?]) 사랑은 하나님의 사심 없는 사랑이고, 인간의 더 낮고 이기적인 사랑인 필레오(명사형은 친구라는 의미인 필로스[philos])보다 더 수준이 높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일하시는 반면 베드로는 그보다 수준이 낮은 사랑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 양보하시고 베드로를 베드로가 있는 자리에서, 인간 사랑의 수준으로 만나주신다.
이러한 해석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더욱이 이 복음서는 물론이고 성육신 교리에도 전혀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러한 해석은 플라톤 철학과 영지주의의 주장이며,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신 “진품”의 불량 모조품이라고 보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은 친구 사이의 사랑이요, 친구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요한일서가 이 주제를 훌륭하게 다룹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필레오를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에 흔히 사용하므로, 땅의 사랑과 하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4과 17장을 다시 읽어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범주를 제거하셨습니다. 땅의 일이 곧 하늘의 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어요.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고요. 생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대로 사랑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제16장 최초의 조찬 모임, 디베랴 호숫가 조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