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수많은 작가, 신학자, 철학자, 예술가, 시인들에게 영감을 받았고, 덕분에 정의,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행동에 대해 다시금 묻고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형사 사법 제도가 추구하는 정의, 분배 정의, 절차 정의를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인간의 고통과 일상을 둘러싼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는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양한 사회 제도 및 기관(여기에는 교회도 포함됩니다)에서 드러나는 불의, 위해, 부패에도 주의를 기울였으며 특히 이런 위해에 수반되기 마련인 폭력과 부정의 순환,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법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책은 약 5년에 걸쳐 나눈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5년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 즉 시리아 난민 위기, 파리 폭탄 테러, ISIS의 공격, 브렉시트, 미국 대선과 총선, 환경 문제, 사회 경제 위기가 전 세계에 미친 영향들도 다루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이러한 문제들을 마주해 적절하게 생각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화는 필수적입니다. 생각을 반성하기 위해,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함께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 독자들도 ‘우리와 함께 생각’하기를, 그럼으로써 정의와 사랑과 관련된 자신의 고유한 물음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는 방식을 찾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적은 생각하는 습관, 자신도 모르게 답습하고 있는 문화적 습관을 쇄신하고 시간, 은총, 자비, 용서에 관해 질문함으로써 다른 시간이 아닌 바로 이 시간, 즉 현재를 충만히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데 있습니다.
--- pp.30~31
덕으로서의 사랑은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정의도 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고대부터 정의는 절제, 지혜, 용기와 더불어 사추덕四樞德, cardinal virtues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절제란 태도와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고, 지혜란 목적에 맞는 적절한 수단을 찾을 줄 아는 것이며, 용기란 끈기 있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고, 정의란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주는 것이지요. 이 네 가지는 습관화된 기질, 굳게 자리 잡은 태도, 성향입니다. 사추덕은 선한 행위의 추樞,cardo, 말하자면 축이 되지요. 사추덕에 대한 논의는 인간 본성에 관한 폭넓은 논의로 전개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덕목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이 성숙하는 과정에 대한 이런 논의를 무시하고 정의를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 p.50
역사는 여전히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지요. 우리는 이를 흔히 간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 지금 우리의 모습, 우리는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는 현실을 똑바로 보는 것, 혹은 올바로 보는 것으로서의 정의의 문제입니다. 호주 원주민 사례든, 노예 무역 피해자의 후손들 사례든, 어린 시절 성적 학대를 당한 기억을 안고 사는 성인의 사례든 우리는 역사가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모습으로 빚어냈는지 우리는 똑바로 봐야 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해야지요. “이제 해결됐네” 같은 말을 할 게 아니라요
--- p.59
모든 것을 정체성을 발견하는 계기로 만들려는 열정 어린 시도는 참 당혹스럽습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영원히 참된 정체성이 있고 그걸 찾겠다는 노력 말이지요. ‘당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식의 수사법이 인기를 얻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고정된 것들이 있고 적절한 조건만 갖추면 그걸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도대체 왜 ‘이것’ 혹은 ‘저것’을 원하는지, 왜 ‘저것’보다 ‘이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지, 그걸 얻어야만 하는 이유, 혹은 이루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 시공간을 사는 나에게 가능한 건 무엇이고, 불가능한 건 무엇인지, 가능한 걸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여기서 저기로 나아가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 pp.133~134
요즘 일부 문화와 공공 담론에는 병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 과거에 저지른 실패나 잘못을 인정하면 뭐랄까, 파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고요. 전 대통령이 부패한 정치인이었고 폭력 범죄자였다거나, 몇십 년 전 정부가 대량 학살에 연루되었다거나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결코 체면이 손상되어서는 안 되는, 명예에 집착하는 사회에 사는 것처럼 집단 전체가 행동한다는 뜻인데, 너무나 기이하고 골치가 아픈 일입니다. 발칸 반도를 보세요. 발칸에 사는 모든 집단은 다른 집단에 적어도 한 번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피해자이기만 한 집단은 없어요. 가해자이기만 한 집단도 없고요. 이제 사람들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때는 피해자였지만 저 때는 가해자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는 피해자였지만 저기서는 가해자였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이게 역사를 보았을 때 진실입니다. 우리가 피해자, 혹은 가해자에 갇히지 않기로 결단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그러한 수사를 남발하면서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있지요.
--- pp.169~170
우리의 목표는 완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목표는 은총으로, 타자 앞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행동할 수 있고, 관계 맺을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배움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멋진 점은 배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움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우리를 확장하는, 우리 바깥을 향하는 활동이지요. 그리고 “나는 더 배워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희망, 갈망을 표현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육 과정을 통해서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