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선조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이동한 길은 크게 두 갈래다. 첫 번째는 동아프리카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경로다. 당시 호모사피엔스는 수백 명씩 집단을 이루어 시나이반도를 지나 오늘날의 유럽으로 향했다. 한데, 그들이 지나간 곳은 네안데르탈인의 세력권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 경로로 다른 대륙에 진출하려는 호모사피엔스의 첫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은 그들과의 충돌과 경쟁에서 패한 결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지역 기원설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은 35만 년 전 무렵 인류와도 공통되는 호모에렉투스에서 갈라져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현생 인류보다 훨씬 먼저 아프리카를 나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2만~13만 5,000년 전의 일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동아프리카에서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반도에 상륙한 뒤 해안을 따라 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퍼져 나가는 경로다. 이 길을 택한 이들은 어느 정도 이동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DNA 해독 결과에 따르면, 이 집단은 6만 7,000년 전부터 5만 1,000년 전 사이에 인도에 도달했고,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와 동아시아에 진출했다. 그리고 먼 훗날 그 집단은 동아시아에 도달한 후 그중 일부가 시베리아 방면으로 북상했는데, 이는 대략 1만 5,000년 전의 일이다. 시베리아 방면으로 북상한 이들은 빙하기로 해수면이 낮아지자 당시만 해도 육지로 이어져 있던 베링 육교(Bering Land bridge)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이렇게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난 인류의 조상은 아시아 대륙에서 남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넓게 흩어져 정착했다.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 이유는 ‘뇌 용량’이 커졌기 때문이다?」중에서
로마 공병대가 정비한 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길을 만들 때는 우선 지면을 1~1.5미터 정도 파낸 후 도로의 토대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토대는 자갈을 30여 센티미터 두께로 촘촘하게 채워 강하게 다지고 그 위에 점토, 자갈, 돌멩이를 섞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멘트 층을 쌓아 만들었다. 이렇게 2층 구조를 다졌기에 무거운 전차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튼튼함을 지닐 수 있었다. 이 위에 수많은 돌멩이를 활 모양으로 빽빽하게 깔고, 맨 위 도로 표면에는 큼직하고 평평한 돌을 깔아 울퉁불퉁한 요철을 없앴다. 전쟁이 없던 시절에는 군대가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공병대가 먼저 길을 닦기도 했다. 이렇게 해두면 유사시에 신속하게 진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병사들에게 일거리를 마련해주어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틈을 애초에 차단할 수도 있었다. 로마 가도는 속주에서 로마에 바치는 공물을 운반하는 길이기도 했다. 또 상인의 왕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무역로 역할도 겸했다. 아프리카의 상아와 아라비아의 침향, 인도의 후추 등 진귀한 향신료와 보석, 면직물, 중국의 생사와 실크 제품이 로마 가도를 거쳐 로마로 들어왔다. 로마에서는 와인, 속주인 이스파니아(이베리아반도)에서 생산된 납과 주석, 이집트의 아마포, 지중해의 산호 등을 로마 가도를 통해 내보냈다. 로마 가도를 따라 각지에서 로마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정보 교환이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가 광대한 영토를 장기간에 걸쳐 지배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이러한 정보 전달 구조 또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총 연장 30만 킬로미터의 로마 가도가 대제국 로마를 지탱하다」중에서
실크로드 세 갈래 길 중 가장 나중에 열린 길이 ‘바닷길’이다. 온주(원저우), 천주(취안저우), 광주(광저우) 등 중국 남부 도시에서 인도차이나반도, 수마트라, 말레이, 인도양, 아라비아해를 거쳐 홍해에 이른다. 바닷길은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가장 큰 위험이 도사린 ‘길’이었기에 개개의 무역권이 독립해서 존재했다. 2세기에 중국으로 건너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재위 161~180)의 사자는 이 바닷길을 이용해 일남(日南, 베트남)까지 갔는데, 이렇게 성공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한 예는 극히 드물었다. 마침내 8세기 이후, 아라비아 상인이 비단을 찾아 적극적으로 중국까지 진출하면서 바닷길이 동서 무역의 주요 경로로 자리 잡았다. 바닷길은 대량의 물자 운반에 적합해 조선과 항해 기술이 점점 발달함에 따라 더욱 활발히 이용되었다. 바닷길을 활용한 동서의 일체화는 대항해시대 훨씬 이전에 시작된 것이다.
---「8세기 이후, 비단을 거래하는 아라비아 상인 덕분에 동서 무역의 주요 경로로 자리 잡은 ‘바닷길’」중에서
이슬람 세계는 제지공이라는 뜻밖의 귀중한 ‘전리품’을 획득한 것이다. 머지않아 사마르칸트에서는 페르시아만 연안의 특산품인 아마포 조각을 원료로 양질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이 확립되었다. 종이를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이슬람제국 내에서 사마르칸트산 종이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천일야화』로 잘 알려진 아바스왕조 제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H?r?n al-Rash?d, 재위 786~809)는 제지 산업을 국영사업으로 정하고 수도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제지 공장을 신설했다. 이는 793년의 일이다. 국내에서 종이가 대량 생산됨에 따라 종이는 국외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다마스쿠스산 종이는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이 시대는 바야흐로 이슬람 세계가 급속도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이슬람 문화권이 널리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제지 공장이 곳곳에 세워지면서 제지 기술이 전파되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당이 패배함으로써 중국 고유 기술인 제지법이이슬람권과 유럽에 전파되어 세계사를 바꾸다」중에서
이런 봉건제도가 왜 바이킹의 침입과 연관 있다는 것일까? 잦은 외적의 침입에 직면하게 되자 멀리 있는 국왕보다 ‘가까운 곳에 사는 유력자’의 지원이 훨씬 절실하게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마침 그 시기에 서프랑크왕국은 왕권이 약해짐에 따라 영주들은 상호 계약으로 주종관계를 맺고 외부 침략에 대처했다. 소규모 영주는 더 큰 힘을 가진 특정 지방 영주의 신하가 되었고, 지방 영주는 중앙 귀족과, 중앙 귀족은 국왕과 주종관계를 맺었다. 신하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만 한다면 여러 영주와 계약을 맺어도 무방했기에 중세 유럽 사회에는 층층이 주종관계가 성립했다. 유력한 영주 휘하에는 수많은 가신이 모여들었다. 이로써 세력이 커진 영주는 기사단과 토지를 확보하고 자기 영토 내 지배력을 획득한 ‘제후’로 성장했다. 이렇게 주종관계가 겹겹이 맺어지는 사이 유럽 봉건제도가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북방 미개척지에서 내려온 바이킹은 기존의 중세 유럽 사회 구조를 완전히 뒤집고 새로운 판을 구성하는 열쇠를 쥐고 있었다.
---「유럽 사회의 봉건제도가 바이킹 침략의 산물이라고?」중에서
정화의 항해로 많은 국가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방문했다. 정화가 이끈 대함대는 각지에서 얻은 특산품을 명나라로 싣고 왔다. 정화가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차례 계속된 대항해가 명나라의 국력을 좀먹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함대를 꾸리고 파견하는 데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은 데다 사절단에게 들려 보내는 하사품 등으로 재정적인 부담이 커졌다. 이에 따라 정화의 대항해 이후 명나라는 대규모 원정 정책을 중단하게 되었다. 조공무역과 책봉체제는 국가가 주도한 해외 원정으로 민간인의 자유로운 해외 무역은 발전하지 못했다는 한계도 있었다. 중국 상인의 무역권은 인도양, 남중국해에 한정되었다. 그 결과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후퇴하고,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해상 무역과 문화 교류의 장에서 중국은 한참 뒤처지게 되었다.
---「위대한 공을 세웠으나 역설적으로 명나라의 국력을 좀먹고 쇠락의 길로 이끈 정화의 일곱 차례 원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