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시간은 실재하는 시간과 무관한 바깥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작용을 받지 않는 시간, 그 바깥의 시공간은 진짜의 세계가 아니라 ‘그림자’의 세계이기 때문에 현실보다 자유롭고 아늑한 한편 어떤 죄의식을 느끼게 합니다. 타인들과 공유할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내부에의 침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쓸쓸함이 고립이나 자폐와 같은 완전한 절대성으로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쓰라림에 가까운 쓸쓸함은 나라는 고유성과 타자의 고유성이 만나 튿어진 자리에서 발생하는 정념입니다. 각자가 내재성을 더 많이 품고 있을수록 그 만남에서 ‘찢긴 상처’의 상흔은 깊습니다. 문학은 그 찢긴 상처들과 튿어진 마음들이 모여드는 자리입니다. 모여서 다시 또 상처를 후비는 싸움을 지속하는 자리입니다.
---「책머리에」중에서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수록된 단편들이 우주 개척, 외계인과의 잘못된 만남, 기계 인간과의 전쟁과 같이 손쉬운 장르 서사로 흐르지 않고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연결하려는 일원론적 세계관, 외계인과 행성에서 ‘신’을 읽어 내고 지구의 모순투성이의 삶을 긍정하려는 기획들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거나, 세상 만물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식의 일원론이 아니다. 그것은 외계인이 미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인간과 함께 공존하고, 그 타자들(신 혹은 외계인)이 자연과 인간 세계의 변화 원인으로 깃들어 있다는 것과 같은 스피노자의 일원론, 혹은 범신론을 연상시킨다.
---「SF와 스피노자식 사랑법: 과학적으로 증명된 윤리학」중에서
존재를 ‘서로를 변양하고 뒤섞고 분해하고 합성하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통일체들이자 개체를 가로지르는 관개체성(貫個體性, transindividualite)으로 이해한다면, 자아 정체성과 근대 주체성이 자리 잡고 있는 굳건한 영토는 새롭게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라는 근대 휴머니즘 역시 이 관개체성과 함께 해체되어 수많은 종들과 상호작용하는 공존의 지평으로 바뀔 수 있다. 김보영은 몇몇 SF에서 이러한 힘들의 교환 활동으로서의 존재론을 간명하게 보여 주었다. (……)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섞이는 관계성에 대한 인식은 이 작품의 전체 의미를 완성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이다. 즉 ‘피가 섞이지 않은 엄마와 딸의 관계란 무엇인가?’라는 저 최초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초능력인 것이다. 개인은 혈연으로 연결되거나 인종으로 정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으로 실현되는 존재라는 것. 이러한 인식에 의해 “내 몸을 구성하는 것은 8할이 너야. 네 몸을 구성하는 것은 8할이 나야.”(15쪽)라는 간절한 사랑의 고백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를 통해 사랑하면 왜 서로 닮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SF, 인류세의 리얼리즘」중에서
우리는 ‘알고리즘이 조종하는 세계 안에서 자율성을 잃고’ 인공 신경이 제공하는 세상 속에서 파도를 타듯 부유한다.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타자의 실체와 사물과 접촉하지 않고 가변적으로 접속하며 가면무도회를 즐기지만, 아이러니하게 이 세계는 혐오와 적대가 넘쳐난다. 불편한 진실과 타자, 사물의 즉물성을 참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만족 속에서 생동하는 물질과 거친 자연, 과학 밖 사실성의 세계는 제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시한 가상현실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객관적 진실을 끊임없이 호출해야 하는 것은 ‘지속과 불변’하는 사실성과 ‘거대한 바깥’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가장 강력하게 우리에게 작동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객체는 어떻게 우리의 세계에 침투해 있는가」중에서
옥주와 석류가 나눈 것, 혹은 그녀와 앵무새가 나눈 것을 감히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무능과 전능, 폭력과 온순을 교환하면서 나눈 것이 개별 존재의 무한한 증폭임은 분명하다. 그 증폭은 때에 따라 사랑, 미움, 증오, 그리움, 분노, 수치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 모든 용솟음을 의미하는 생명과 힘의 파토스를 담고 있다. 그 파토스 속에서 ‘나’는 안전하지만은 않다. 옥주처럼 뜯기기도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더 큰 완전성으로, 더 작은 존재로 만드는 정념(affect)이란 ‘생명력’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서 얻는 축복이자 저주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돌보는 것들이 우리를 돌본다」중에서
장정일 시의 주요한 형식 중 하나는 ‘범죄 현장’과 ‘심판’이다. 표면적으로는 범죄 현장이고, 심층적으로는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끊임없이 죄를 짓고, 죄인을 소환하고, 단죄한다. 그러나 장정일 시의 ‘시적 자아’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그는 ‘어떤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의 죄는 아직 모자라거나 덜 잔혹하거나, 덜 음란하거나, 그래서 다시 돌려보내진다. ‘그것이 네 진심의, 네 신앙의 최대치냐?’ 악마는 언제나 그 관문 앞에서 그가 저지른 악의 진정성을 묻고, 조롱하고, 등을 돌리게 한다. (……) ‘죄를 지은 자는 그가 누구든 처벌받아야 하지만’ 그의 유죄와 최종 심판은 유보된다. 그는 언제나 ‘더 많은 죄를, 더 많은 죄를’ 요구받는다. 장정일은 “청탁을 받을 때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깊은 살의에 빠지곤” 했고, 원고 청탁서는 “그날까지 어김없이 자진해 달라거나 그 날짜에 청탁서를 죽이러 와 달라는 살인 명령서나 다름없다.”라고 고백한 바 있는데 이는 비유적 차원을 넘어서 그의 시에서 수행되기도 한다.
---「시인, 쉬인, 죄인」중에서